-은희경 작가의 우리는 왜 얼마동안 어디에 관한 서술 속에서
내 나이 스물하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아 처음으로 친구와 단둘이 일본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머물 숙소까지 일일이 정해야 했던 그때, 나는 부모님 없이 한국을 떠나 왔다는 사실에 몹시 흥분해 있었다. 모든 걸 친구와 함께, 스스로 정해서 하는 여행은 정말 인상 깊었던 기억이 난다. 이를 계기로 나는 한창 워홀을 결심했었다. 작년 일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어렸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만 벗어나면 뭐든지 잘 될 것이라고, 구체적인 계획도 없으면서 잘도 떠들어대고 다녔던 것 같다.
승아라는 인물도 그랬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계속 치열하게, 지친 서울 생활을 하던 그녀가 우연히 자유로운 뉴욕 생활을 보내는 듯한, 민영의 에스엔에스를 보고 계획도 없이 돈을 쏟아 바로 뉴욕으로 가게 된 것처럼. 승아도 그 생활에 지쳐 한국을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런 그녀를 맞이한 민영. 소설은 뉴욕이라는 공간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두 인물의 심리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이는 작중 내에서 햇빛이라는 장치로 잘 드러나는데, 민영의 방에서 자꾸만 커튼을 거두고, 따사로운 햇살을 보고 싶어 하는 승아와 달리 민영은 방 안에 있는 내내 커튼을 치고 싶어 한다. 마치 햇살 한 줌조차도 방안으로 들여보내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소설의 초반부, 시점은 승아의 토요일부터 시작된다. 나는 처음에 이러한 시간에 대한 설정 부분이 의문스럽게 느껴졌다. 보통 일주일을 보면 시간 순서대로 월요일을 먼저 배치하는 법인데. 왜 토요일부터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중을 보면 승아는 직장도 곧 쫓겨날 것처럼 이야기되기에, 굳이 그녀가 뉴욕으로 도착하는 날을 토요일로 설정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토요일이었을까. 나는 이 의문에 대해 나름대로 답을 내려보기로 했다. 그 결과 승아라는 인물에 대해 더 분석하게 되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승아라는 인물에게 공감하며 글을 읽어나갔다. 나 역시 무턱대고 한국을 벗어나 자유롭고 싶었던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기에. 소설을 읽는 내내 승아의 뉴욕 생활이 잘 되길 바랬다. 하지만 그런 나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승아는 민영의 방 안을 혼자 벗어나는 것도 버거워한다. 마치 조금이라도 방 밖을 벗어나면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소설이 초반부 승아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을 때에는 민영이 입게 느껴지기도 했다. 비록 허름하지만,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나름대로 민영이 살아가고 있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반부를 지나고, 소설이 민영의 시점으로 전개되었을 때 나는 어쩌면 그녀 역시도 자유로운 인물이 아닌, 승아와 비슷하게 자유롭고 싶은 인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학회 세미나에서 마이크를 만나 자연스레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외지인인 민영에게 있어 마이크는 의지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를 따라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고, 그의 친구들과 함께 하이킹에 나가게 되었으며, 그와 데이트도 여러 번 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이크는 결코 그녀의 남자친구는 아니었다. 목요일 만남, 하이킹 모임에서 빠졌던 여자가 미국의 순혈성에 대해 떠들어 댈 때도 마이크가 단지 방관할 뿐, 민영을 도와주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마저도 이민자들과 도둑들의 도시인 뉴욕이라는 공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가는 듯도 하다. 이는 마이크의 자전거가 사라졌을 때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민영을 배려할 줄 알던 마이크가 자신의 자전거가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면 과연 어떤 것이 진짜 마이크의 모습인지 보는 나도 헷갈리게 만든다. 분명 민영의 행동은 술에 취한 마이크를 위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뉴욕에서의 사고방식은 적어도 민영이 아는 사고방식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민영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 역시도 뉴욕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 사람의 이민자이기 때문아다. 그렇기에 지하철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빼앗은 남자에게 민영이 현금 모두를 건네주었던 것도, 그러한 불공정한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저항하고자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런 민영의 상황을 승아가 어떻게 알겠는가. 어디까지나 여행자인 승아와 이민자인 민영의 입장은 다르다.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것을 하나의 여행 일정처럼 즐기는 승아의 앞에서 민영의 삶은 자유라는 틀에 전시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승아가 민영의 방을 청소하며, 서울에 있는 자신의 신축 집을 떠올리는 것은 모순적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생존하기 위한 공간이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자유로운 관광 상품처럼 말이다.
이는 동네 산책을 나온 승아의 행동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떠나는 날을 당기고 나서야 동네 산책을 시도한 승아는 스타벅스로 향한다. 한국에도 흔히 있는 그 스타벅스 말이다. 즉, 한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스타벅스처럼 승아에게는 돌아갈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그녀가 토요일에 뉴욕에 도착하게 된 의문과도 일맥상통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비록 그녀는 직장에서 쫓겨날 상황에 놓여있지만, 돌아가기만 한다면 다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승아의 상황에서 토요일이라는 날짜는 매우 안정적으로 느껴진다. 토요일은 누구나 쉬는 주말이기에. 마지막 수요일 챕터에서 그녀가 이틀 뒤 돌아간다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읽힌다. 마치 어떤 충성도 같은 게 포함되어 있는 그녀의 성실함처럼 말이다.
하지만 민영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그녀는 뉴욕이라는 공간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면접을 보러가기 전 비싼 명품 정장을 시착 했을 때처럼 조금이라도 더 남들보다 여유로워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승아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민영의 태도를 단순히 민영 개인의 방식 차이로 받아들인다. 이는 승아가 여지껏, 단 한 번도 뉴욕을 생존하기 위한 공간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민영의 삶조차도 어느샌가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공원에서 승아와 민영이 함께 맨해튼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승아가 얼마 동안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보라는 말을 민영에게 건네는 장면은 매우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살아남기 위한 공간인 뉴욕에서 얼마 동안 어디에 있는지 가늠해보는 것 이상으로, 쓸데없고 무가치한 것이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민영도 승아와 같이 뉴욕에서 아름다운 맨해튼의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 올까. 온다면 그건 언제일까. 부디 그렇게 동등하게 민영과 승아가 같은 풍경을 바라보기를 만들게 하는 날이 언젠가 오기만을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