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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창인J Mar 31. 2024

낙원(樂園)의 끝에서

-정한아 작가의 바다와 캥거루 낙원의 밤을 생각하며

 소설을 읽기 전부터 제목인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 사이 어떤 의미가 연관되어 있을지 궁금했다. 동 떨어진 단어들을 제목에 사용한 만큼, 작가가 이 세 개의 키워드로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낼지 기대가 되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조금 더 그 키워드들을 가지고, 작품을 바라봤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는 이 키워드들과 각각 소설에 등장하는 공간들이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러한 방식으로 작품을 풀어내 보기로 했다. 


#바다


  바다는 작중에서 딸인 시원과 ‘나’가 두 번째 남편인 윤을 피해 달아난 곳이기도 하다. 이 공간에서 ‘나’와 시원은 사흘을 같이 보냈다. 그럼에도 ‘나’는 시원과 함께 시간을 공유하기 보다는 상담사인 최에게 상담하는 등, 스스로 급급함에 쫓겨 시원을 방치했다. 다음 날까지 시원이 난로에 팔을 데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시야에서 온전히 시원이 바깥에는 존재만은 아니다. 바닷가에서 시원이 파도 앞으로 점점 다가설 때 그녀는 미친 듯이 시원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럼에도 파도는 시원을 훑고 갔다. 시원은 그 당시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렇게 추운 곳에서 산다니 정말 불쌍해. 어떻게 물고기들은 죽지 않는 거야? 어떻게 그 속에서 사는 거야?     

 이에 ‘나’는 오 분만이라도 시원에게 조용히 하라고 답하며, 시원이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원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작중 행적으로 볼 때, 어쩌면 ‘나’는 시원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것들을 바다에 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 모든 것 안에, 자신의 과거와는 분리되어서 살고있는 딸인 시원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시원은 어떤 불평의 말도 던지지 않았다. 단지 묵묵하게 받아들일 뿐. 

 그렇기에 이러한 태도에서 특히 ‘나’와 시원이라는 캐릭터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멈출 수 없어, 다른 사람들에게 까지 감정을 풀어내는 캐릭터가 ‘나’라면 시원은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고통을 참아내는 캐릭터다.     

#캥거루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고통을 묵묵하게 버티며 살아가던 시원에게도 언젠가부터 목표란 것이 생겼다. 바로 호주에 가는 것이다. 이에 ‘나’는 반대의 의사를 표현하며 아버지인 김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호주에 가냐고 묻는다. 이에 시원은 엄마가 엄마인 것처럼 아버지도 아버지이고, 환상 같은 것은 없고 단지 이곳이 지겹다고 답한다. 

 그렇기에 나는 캥거루라는 키워드가 매우 환상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캥거루는 호주라는 공간을 대표하는 동물이다. 또한 특성상 새끼를 배에 있는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동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캥거루로 상징되는 의미들과 시원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시원은 늘 어미가 아닌, 타인에게 맡겨 자라났으며, 호주 같은 곳은 아버지인 김이 없었다면 꿈꾸지 못할 장소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시원이 자신의 고독을 고백하며 환상 같은 것은 없다며 자신이 겪었던 현실은 인정하는 장면은 더욱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비록 이러한 행동들이 자신의 손에서 시원을 잃지 않도록 했던 행동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출국하기 전, 그녀가 자신이 생각날 때면 보라고, 항상 달고 다니던 캥거루 인형을 ‘나’에게 주는 장면을 보면 만약 ‘나’의 상황이 조금이라도 달랐다면, ‘나’와 시원이 서로를 이해해주며 살아가는 존재가 될 수 있던 게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낙원의 밤      

  시원도 떠나버리고 끝내 ‘나’에게 남겨진 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관리하라고 주신 해피 아파트였다. 시원이 떠나기 전까지도 그녀는 나름대로 이 공간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들을 했다. 303호 할머니의 암 투병 사실과 304호의 남자의 난동을 무시하고, 302호의 여자의 강제 퇴거 명령을 철거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아버지에게 이 공간에 대한 관리를 부탁받은 사람에 불과하기에. 그녀가 주민들에게 해줄 수는 없는 것은 없다. 그녀 역시 관리직이라는 직책을 부여받은 것 말고는 다른 주민들과 직면한 현실은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에 주민들이 선택한 방식은 각각 달랐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순응했고, 302호의 아이들과 303호 할머니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 쳤고, 304호는 현실에 버티지 못해 여러 물건을 깨부수며 어떻게든 살아가는 방식을 택했다. 

 여기서 누구의 방식이 옳다 감히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러한 주민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303호 할머니인데, ‘나’는 그녀의 암 투병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할머니의 죽음은 관리비에 포함되지 않으며, 그렇기에 그녀 역시 여기서 죽을 권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집에 이중 잠금을 걸어놓고, 퀴퀴한 냄새를 풍기던 그녀가 죽었을 것이라고 ‘나’는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집 안에 있던 것은 할머니가 아닌 302호의 아이들이었고, 퀴퀴한 냄새는 시체가 아닌 썩은 음식물 쓰레기의 냄새였다.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는 돌연 짐을 싸서 나가버렸다고 했다. 죽음을 앞둔 그녀는 도대체 어디로 향했을까. 

 나는 그녀가 스스로 낙원(樂園)을 찾아 떠나버린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만큼 행복하지 못한 곳에서 죽는 것보다는 스스로 맞이하는 죽음이 낙원에 갈 수 있는 쉬운 방법일 테니 말이다.

 그렇게 303호 할머니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아이들과 ‘나’는 파출소로 가려 하지만, 갑작스레 앞서나가던 아이들은 진로를 틀어 낙원 웨딩홀이 있었던 건물로 들어간다. 낙원 웨딩홀은 ‘나’가 처음으로 결혼식을 올렸던 장소이자 시원(始原)을 꿈꿨던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 건물은 연회색 빛의, 멀끔한 요양원이다. 끝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장소이다. 즉, 정말로 낙원(樂園)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김과 같이 있는 시원의 사진을 본다. 시원을 떠올리게 하는 잠든 여자아이를 본다. 다시 오지 않을, 시원과 보냈을지도 모를 낙원에서의 순간을 생각한다. 그 온기를 떠올린다.

 이제야 ‘나’는 알아버린 것이다. 낙원은, 아니 시원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요양원이 되어버린 낙원 웨딩홀처럼 그녀 역시 수없이 낙원(樂園)으로 가기 위한 밤을 보낼 것이라고.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그녀 곁에서 시원이 보냈던 온기가 남아있길, 그녀가 수많은 낙원의 밤을 홀로 보내지 않길.  나도 모르게 소설의 결말을 보며 기도하게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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