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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창인J Mar 31. 2024

작가들과의 인터뷰: 존재에 대한 보고서

오이디푸스와 햄릿, 이 두 작품을 읽고 나서 작가 지망생인 J씨는 문득 한 가지의 의문점을 품게 되었다. 존재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궁금증을 도무지 풀어낼 수 없었던 이씨는 결국 두 작가들을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다음의 글들은 그에 대한 기록본이다. 

     

(소포클래스)     


 제가 좀 늦었죠. 오는 데 좀 길이 막혀서.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만나자고 하셨는지. 인터뷰요? 무슨 인터뷰를 말씀하시는 건지. 


아, 오이디푸스요. 뭐 다들 알고 계시는 거 아닌가요? 내가 그 작품으로 대회 우승까지 했는데, 모를 수가 없죠. 요즘엔 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말도 생겼다던데. 그만큼 내 인물이 뛰어났다는 거 아니겠어요. 네? 구체적으로요? 뭘 구체적으로 말할 게 더 있나. 그냥 있는 그대로이지. 오이디푸스라는 자가 자신의 부모님을 부모님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죽여버리는 그런 이야기죠. 엄청 비극적이라고요? 그렇죠. 부모님을 죽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왔으니 어찌 보면 비극적인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매우 단편적으로 당신은 그 이야기를 파악하고 있는 거예요. 그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왜 그렇게 뚱한 표정으로 쳐다봐요. 사람 무안해지게. 뭐요. 거기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요. 진짜 귀찮은데. 알았어요. 알았어. 딱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으라고요.


 당신도 읽어보셨다면 아셨듯이 이야기는 늦게 시작되죠. 오이디푸스가 신탁을 받는 장면부터 말이에요. 여기서부터 큰 사건이 시작되는 거예요.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찾는 부분에서부터 말이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봤을 때 이야기에요.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죠. 아까 당신이 말한 대로 라면 이건 어떻게 보면 매우 운명론적인 관점으로도 해석될 수 있어요. 결국 이렇게 거대한 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신탁이 내려왔기 때문이니까요. 


 하지만 단순히 이 이야기가 운명론적인 서사에 불과하다면, 당신이 존재에 대해 고민할 이유도 없겠죠. 왜 그래요, 어떻게 알기는. 아까 그쪽이 말했잖아요. 오이디푸스라는 존재에 대해 들어보고 싶다고. 근데 있잖아요. 나도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이 이야기가 왜 비극이라고 생각해요? 아니, 지금까지 내가 말했으니까 한 번 정도는 질문해도 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음. 자신의 눈을 찔러 자멸을 해서 비극이라. 틀린 말은 아니죠. 어쨌든 눈을 찌르게 되는 것으로 오이디푸스는 영영 장님이 되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과연 그게 비극일까요?


 물론 이 작품은 비극이 맞을지도 몰라요. 결말에서 대부분 인물들이 불행지잖아요. 라이오스왕과 이오카스테는 죽고 오이디푸스는 시력을 잃어버리고. 근데 나는 이 이야기가 단순히 모두가 불행해졌기 때문에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령, 오이디푸스를 예로 들어봅시다. 그는 신탁에 내려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예상했을 거예요. 테이레시아스의 말들이라든지 계속해서 돌아가는 상황이라든지. 모든 답은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요. 하지만 비밀을 밝혀지는 순간을 보면 정말 재미있지 않나요? 오히려 자신을 얽매이는, 범인을 찾아내려는 오이디푸스의 명령이 마지막에 가서 진실을 밝혀내는 열쇠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적인 일이에요. 그때부터 이야기는 빠르게 긴장감을 가지고 한 번 절정에 오르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오이디푸스에게 던지면서 말이에요. 즉, 보이는 세계인 현실과 계속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오이디푸스는 눈을 찌른 것으로 답을 찾아낸 거죠, 이건 어떻게 보면 파멸을 맞이한 것 같아보여요. 현실 세계 속에서 오이디푸스에게는 남은 건 딸 안티고네 정도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달려온 결과가 바로 눈을 찌르는 행위였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멋있는 거죠. 현실과 현실을 아닌 세계를 통합했으니 말이에요. 


 내 대답이 도움이 좀 됐나요? 뭔가 아직 부족하다는 표정이네요. 아니면 그 친구라도 만날 볼래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셰익스피어라고 나랑 비슷하게 비극을 쓴 친구가 있는데, 한 번 만나봐요. 혹시 몰라요. 그 친구의 대답이 당신에게 도움이 될지. 전화번호 알려 줄 테니까 한 번 만나보기라도 해요. 나처럼 인터뷰도 해보고, 알았죠?   

  

(셰익스피어)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래요. 제 이야기가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최대한 대답해드릴게요.


 어, 햄릿이요? 햄릿의 존재에 대해서라니, 매우 큰 단어네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햄릿’은 저에게도 매우 어려운 인물이에요. 다시 한번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하거든요. 막 햄릿이 어느 때는 정말 미쳐서 복수를 하고 있는 것처럼 읽히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햄릿이 진짜 치밀하게 잘 계획을 잘 세운 것처럼 보이기도 하거든요. 네? 의도요? 글쎄요. 햄릿은 의도로 만들어진 인물이기보다는 그냥 스스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인 것 같게 느껴져서 말이에요. 


 생각해봐요. 햄릿이 미쳤다는 연기를 하겠다는 대사를 내뱉을 때 연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미쳐버린 건지 헷갈리기 시작하잖아요. 그 행동들이 어떻게 보면 진짜 미쳐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완벽한 연기인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렇게 이 작품의 초반은 매우 ‘거짓’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보는 이들은 추측으로밖에 가늠할 수 있죠. 왜냐하면 우리 눈에 실제로 보이는 세계는 모순투성이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보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긴장감을 유지할 수밖에 없어요.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지. 자꾸만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질문을 하게 만들죠.


 네? 오이디푸스요? 음, 그런 부분도 비슷할지도 모르겠네요. 거기서도 자꾸만 인물이 자신에게 질문은 던지니까요. 하지만 조금 달라요. 오이디푸스가 파멸처럼 보이는 결말 장면에서 현실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합일된 존재라면, 햄릿은 정말로 파멸된 존재거든요. 음, 거기에 대해 말하려면 좀 설명이 길어지는데. 당신 말대로 햄릿 역시 불행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어요.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고 남겨진 어머니와 삼촌이 결혼을 하고, 그리고 자신이 ‘복수’를 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면서 모든 상황이 혼란 속으로 점점 빠지게 되었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아까 앞에 말했듯이 햄릿의 행동은 우리로 하여금 헷갈리게 만들어요. 복수를 한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음에도 이를 실행하려는 노력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일단 이러한 특징이 오이디푸스와 구별되죠. 거기서는 적어도 인물이 왕을 죽인 범인을 찾기라는 목표를 위해 많은 행동들을 하잖아요. 

 물론 어디까지나 복수라는 것은 햄릿의 표면적인 목표에 불과해요. 뭐 아버지의 망령이라는 존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게 꼭 아버지의 망령이라는 확신은 없잖아요. 실제로 첫 장면에서 기사들은 유령의 존재를 인식하지만 거트루드와 대화를 할 때는 그녀는 유령을 인식하지 못하잖아요. 그게 진짜 아버지의 망령이었다면 거트루드도 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해가 잘 안 되셨나요? 계속 멍한 표정으로 보고 있길래. 네? 거트루드와 오필리아요? 여성 캐릭터라. 뭐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실제로 작품 내에서 존재라는 인식에서는 먼 인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이유는 단순히 그녀들이 여성 캐릭터들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어요.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매우 이분법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들이 존재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다른 이유에 있다고 생각해요. 먼저 거트루드를 봐볼까요. 아까 앞에서 보는 이들이 진실을 누가 말하고 있는지 매우 헷갈려 하면서 극의 긴장감이 유지된다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저는 이 긴장감을 절정까지 올려놓은 인물이 거트루드라고 생각해요. 거트루드가 진실을 햄릿에게 고백함으로써 이야기는 갑자기 빠르게 전개되기 시작하거든요. 그 이후로 폴로니어스도 죽고 오필리아도 죽고, 레어티즈와 햄릿이 싸움을 하기 시작하는 등 작품은 매우 혼란 속에 빠진 것 같아 보여요. 그건 바로 모든 상황이 진실 속에 놓여졌기 때문이겠죠. 더이상 거짓말은 통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 지점에서 거트루드에게 이야기가 집중되지는 않아요. 오히려 햄릿의 시점으로 넘어가면 넘어갔지, 그녀는 단편적인 부분으로만 있을 뿐이에요. 오필리아도 마찬가지예요. 작중 내내 그녀는 유일하게 햄릿의 이해자로 나오는 것 같아 보여요. 그리고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이야기는 더욱더 긴장감을 갖게 되죠. 레어티즈의 관계라든지, 앞으로 상황이라든지 말이죠. 하지만 그녀에게 집중되는 장면들은 거의 없어요. 그래서 충분히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여지는 있다고 봐요. 그래도 확실하게 단정 짓는 것은 작품의 세계관을 줄이는 일이 아닐까요?


 아니, 그렇게 미안한 표정 짓지 않아도 돼요. 어찌 되든 간에 해석은 읽는 사람 나름이니까. 어쨌든 그 이후로 이야기의 국면은 새롭게 변해요. 보이는 세계인 현실과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햄릿은 갈등을 하기 시작해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이죠. 그러면서 외부의 갈등도 심화 되기 때문에 결말을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예요. 그런데 꼭 컴플레인이 들어오더라고요. 왜 이렇게 허무하냐고 말이에요. 당신도 그랬나요? 음,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햄릿의 죽음 때문에요. 그렇군요. 그래서 ‘햄릿’이라는 인물은 어려운 것 같아요. 결국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자신을 통합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그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아까 당신이 말한 오이디푸스와는 완전히 구별되는게, 햄릿은 차라리 합일되지 않는다면 미쳐버리는 게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그렇기에 질문은 여기서 확장되죠. 햄릿의 작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개인적인 질문에서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까지 확장되는 게 저는 이 작품의 가장 특징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 햄릿이라는 인간이 어떤 존재이냐고 딱 확실하게 대답하는 것은 어려운 것 같네요. 결말을 보시다시피 햄릿은 끝내 그 고민을 하다가 미쳐 죽어버렸으니 말이죠. 하지만 그렇기에 더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도 가끔 자신의 존재가 누구인지 고민을 하는 시간이 있지만 확실한 답을 내리지는 않잖아요.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햄릿도 그러한 존재로 받아들여졌으면 해요.


 아, 기록이요? 네 물론이죠. 아니에요. 제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네요. 혹시 또 궁금한 거 있으면 연락주세요. 오늘 덕분에 정말 즐거웠습니다.   

   

 (J씨)     

 두 분과의 인터뷰를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일단 먼저 존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던 게 좋았던 것 같아요. 두 작가님의 작품 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캐릭터들을 다루고 있잖아요. 그래서 문득 궁금해지더라고요. 작가로서, 어떤 생각으로 이 캐릭터들을 다루고 있는 것인지 말이에요. 


 그렇다고 딱히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답변을 내리지는 못했어요. 셰익스피어 작가님의 말씀처럼 저라는 존재는 계속해서 변화하니까요. 그러다 문득 저번에 썼던 글이 하나 생각났어요. 과제로 냈던 남이 보는 나와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 나에 대해 작성했던 글이었는데, 내가 진짜 나란 존재에 대해서 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음, 그때 뭐라고 썼냐면요. 남이 보는 나와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 나의 성격을 쓰고, 그리고 그런 둘의 존재를 충돌하지 않기 위해 글쓰기라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과 그 두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냅두겠다고 말했어요. 그 두 존재도 다 ‘나’니까 말이에요. 근데 두 작가분과 인터뷰를 나누면서 또 어떤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꼭 남에게 드러나는 나와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 나를 구분해야 해야 하는지 말이에요. 물론 두 존재(자아)라는 것이 확실히 내 안에 있기는 하지만 굳이 그 존재들을 합일시켜야 할까요?


 그래도 지금까지 후회는 없어요. 두 존재 역시 나니까. 남에게 보이는 나와 그렇지 나는 확실히 존재한다고 믿었으니까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거 자체가 나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나’라는 존재는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남에게 드러나는 나라든지 그렇지 않은 나라든지 확실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왜 두 존재를 냅두며 지낸다더니 그렇지 않다더니 그런 고민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지 싶더라고요. 


 그렇게 보면 정말 간단한 것 같아요. 오이디푸스도 햄릿도 모두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 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비극이라는 파국을 맞이한 거잖아요. 저도 한때는 두 인물들처럼 ‘나’라는 수많은 존재가 부딪치는 게 두려웠어요. 그래서 글쓰기라는 방법을 선택했고 허구적인 것들에 매달리기 시작했죠.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거든요. 공상은 공상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해결해낼 수 있으니까 말이에요. 즉, 어떻게 보면 저도 세계와의 합일을 원했던 거죠. 하지만 늘 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 내가 쓴 글 속에서는 인물들이 어떻게든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데, 정작 현실의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방치라는 선택을 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현실에도 형식적이지만 루트가 존재하긴 하잖아요. 뭐 이 나이가 되면 취직을 해야 하고, 뭐 그런 것들 말이에요. 하지만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고 세계와의 합일을 결심하고, 햄릿이 자아를 합일시키지 못해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존재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형식적이지 않아요.


 그래서 더 어럽죠. 남이 드러나는 나와 남이 드러나지 않는 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전보다 더 망설여지는 이유도 분명 그 때문일 것이에요. 존재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저는 두 작가분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던 것인데, 더 미궁으로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


 그래도 중요한 것들은 알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에요.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고, 그것을 정의할 수는 없다는 것. 그렇기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갈망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그에 대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그런 과정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나중에 이런 것들을 적용해서 제 이야기에도 한 번 써봐야 겠어요. 존재라는 것은 무엇인지. 그러면 지금과는 또 다른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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