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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창인J Mar 31. 2024

동경(憧憬)을 너머서

-박상영 작가의 '동경 너머 하와이'를 상상해보며

남들처럼만 살 수 있을까.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남들처럼만 아주 평범하게. 좋은 학교에 가고, 훌륭한 직장을 구해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어쩌다 보니 흘러가는 시간을 살아가는 것. 한때 나도 그러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미친 듯이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자소서에 한 줄이라도 더 쓰기 위해 대외활동이나 동아리를 준비하면서 미래를 준비한다는 말속에 자주 숨곤 했었다. 정상적인 굴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은 아직 준비 기간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이십 이년을 보냈다. 앞으로 그 준비를 끝마치기까지 얼만큼의 시간이 남았을까. 여전히 나로서는 가늠하기 어렵다.


 소설도 나오는 ‘나’ 역사 나와 다를 바 없다. 물에 빠진 채로도 쳇바퀴를 굴리는 햄스터처럼 새벽부터 소설을 쓰다가 아침이 되면 회사로 출근을 하고, 그 사이에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소설을 쓰다가 다시 업무에 빠지는. 그 역시도 어떠한 굴곡도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삶을 보내는 듯하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레 사건이 터진다. 아빠와 원모의 실종이다. 


언뜻 보면 이 두 인물의 실종을 부모- 애인 간의 관계에서 일어난 트러블로 인한 실종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빠와 원모, 두 인물 다 ‘나’에게 있어 부모나 애인처럼 어떠한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아빠라는 인물을 살펴봐도 그는 어디까지나 타인에게나 호인이었을 뿐 가족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아빠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해봤자 스스로만 상처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심리는 원모와의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그와 관계를 여러 번 가지고,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원모와 ‘나’는 결코 애인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원모의 관계를 말하자면 관계 파트너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가 원모와의 관계가 어떤 일종의 구원처럼 느껴졌던 것은 원모 역시도 자신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보니 흘러가는 자신의 시간처럼. 그렇기에 ‘나’는 그 두 사람이 사라졌을 때도 그들이 왜 실종되었는지 의문은 갖지만, 적극적으로 그들을 찾기보다는 체념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래봤자 여기 없는 사람들이라면서 말이다. 


 오히려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하고, 찾아온 것은 원모와 아빠였다. 그들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나’의 앞에 나타난다. 약 때문에 강제 추방을 당했음에도 월 이백짜리 오피스텔과 그 안에 있는 명품들을 모두 버리고 하와이로 떠난다며 ‘나’에게 통보하는 원모와 오십 억이라는 큰돈을 횡령하고도 ‘나’의 회사에 나타나 보험금을 달라는 아빠. 쉴새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 그들이 했던 선택은 어쩌다가 그랬다는 그들의 말처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들도 누군가의 애인이나 아빠이기 전에, ‘나’와 같은 한 사람의 인간이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고모에게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쩌면 자신이 부모라는 관념 속에 그를 넣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더 이상을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가령, 아빠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나’와 ‘나’의 엄마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나’의 엄마라는 인물이 눈에 밟혔던 것 같다. 아빠나 원모와 같이 자세한 인물의 서사는 등장하지 않지만, 작중의 내용을 보면 ‘그들(엄마와 아빠)의 갈등이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었다’는 문장과 같이 ‘나’에게 있어서 엄마는 아빠와 비슷하게 꽤나 견뎌내고 싶지 않은 대상처럼 묘사된다. 


 또한 사십 년 동안 기독교 신자였던 엄마가 ‘나’의 성 정체성을 포함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읽는다는 행위는 그에게 있어 큰 두려움이었다. 그렇기에 아빠의 실종 사건으로 엄마가 ‘나’에게 상담을 할 때도 그는 대충 대답해주며 넘겼다. 그냥 서운한 일이 있을 거라면서 말이다. 이에 엄마는 말한다. 너 역시 혈관에 얼음이 흐르는 박씨 집안 사람 답다고. 이는 ‘나’ 역시도 아빠와 다를 것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 하다. 실제로 자아도취를 하며 글을 써내려가는 ‘나’나 이불을 뒤집어쓰며 칩거 생활을 가끔 하던 원모나 경제관념 없이 펑펑 돈을 써대던 아빠의 행적은 매우 유사한 듯 하다. 그래서 의문이 드는 부분도 있었다. 그렇게 비슷한 성향을 가진 두 남자가 결국에는 엄마라는 한 여자에게 스스로 내부에서 생겨난 동경(憧憬)이라는 관념을 파헤쳐 내기 위해 어쩌면 폭력을 가한 것은 아닐까하고 말이다.


 물론 나름대로 그들이 자신들의 품은 동경(憧憬) 풀어내는 방식은 매우 친숙하면서도 공감이 되는 부분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가 자전소설을 쓰면서도 자신의 소설을 회사에 다니는 누군가나 엄마가 읽었을 것을 상상하면서 걱정하는 그의 모습은, 무언가 자신을 드러내고 싶으면서도 타인의 시선을 계속해서 신경 쓰는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 역시 글을 쓸 때 자전적인 모티브에서 이야기를 많이 따오는 사람으로서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공감이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 자전소설이 많이 이슈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방식을 완전히 공감하기란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자전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도 될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나와 관계된 누군가의 이야기도 될 수 있는 부분이기에.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온전히 현실을 담기 보다는 그 현실을 기반 삼아 어느 정도의 허구가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소설 속의 ‘나’처럼 스스로 정체성을 밝히고, 작품을 냈을 때 완전히 작품의 가치가  달라지는 부분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과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관심이 있는 사람과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그 기준만으로 가치를 부여하기에는 개인적으로 많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단순히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의 글이나 그 외의 예술 작품이 그러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가치를 부여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확실히 답할 수 없다. 어쨌든 그 삶 자체는 그 사람 고유의 개성이기에.


 그렇기에 이러한 소설의 방식을 옳거나 그르다고 확실히 이분법적으로 명시하는 일은 여전히 나에게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다만 이 소설을 읽고 드는 생각이 있다면, ‘나’와 같이 일정적인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품고 있는 동경(憧憬)을 너머 자신들만의 섬에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동경(憧憬)이 아닌, 나만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 단순히 ‘나’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동경(憧憬)의 어떤 한 지점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닌, 모두가 스스로 자신만의 방향을 잡고, 그 동경(憧憬)의 바깥으로 나가려 발버둥치는 것. 그러한 시도조차 귀중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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