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KTX 잡지에서 읽은 구절입니다.
'여행의 이유'에 관한 글이었는데요, 한 곳에서만 살 순 없어서.라는 말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지금 우린 태어난 고향을 벗어나 어디든 갈 수 있죠. 그곳에서 새로운 환경을 학습하고 마침내 적응해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적응의 귀재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그곳에 뿌리를 내린 한국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죠.
적응, 학습, 기억. 생존과 매일의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저는 기억에 관심이 많습니다. 뇌과학에서 기억과 학습을 언급할 때 '시냅스 가소성(synaptic plasticity)'이라는 개념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시냅스는 뭐고 가소성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우리 뇌세포 뉴런은 아주 특이하게 생겼습니다. 뉴런에서 핵이 있는 곳을 머리라고 하다면 머리는 나무처럼 사방으로 가지가 뻗어있고, 그 가지에는 가시가 돋아 있습니다. 가시가 다른 가시랑 맞닿을 듯이 가까이 있는데 그 사이엔 틈이 있습니다. 그 틈을 시냅스라고 하죠.
시냅스는 물리적으로는 끊어져 있지만 기능적으로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끊어진 그 사이, 바로 이 틈에 아름다움이 숨어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서울의 양적, 질적 팽창은 한강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강북과 강남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하루 두 번 띄우던 나룻배로는 사람과 물류의 이동을 감당하기 어려워졌죠. 나루터 언덕 위에 정자와 백사장을 거닐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리가 들어섰습니다. 왕래가 많은 곳에 더 많은 다리가 놓입니다.
반복 학습도 같은 모습입니다. 반복해서 익힐 수록 뉴런 사이의 시냅스 연결성이 좋아집니다. 이를 시냅스 장기 강화라고 합니다. 반대로 교류가 없는 곳은 다리를 거두어들여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죠.
갓 태어난 아기의 머리뼈는 말랑말랑해 숨 쉴 때마다 움직이는데요, 점점 단단해집니다. 그 속에 든 뇌도 서서히 변하는데, 뉴런 안의 시냅스구조나 기능의 변화뿐 아니라 좀 더 거시적인 변화도 포함됩니다.
뉴런의 수는 생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가 4세경에 가지치기를 시작합니다.
앞으로도 사용할 것, 필요한 것만 남기고 손질하는 거예요. 태어날 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구를 세트로 왕창 가지고 있다가 나중엔 필요한 도구만 챙기는 거예요. 쓰기 좋게요.
가지치기는 청소년기까지 지속됩니다.
왜 쓸데없이 많이 만들었다가 가지치기를 할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어디서 태어나고 자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상상해 볼 수 있어요. 새 생명이 태어날 때 우주에서 날아와 지구별 어딘가로 떨어지는 거죠. 누군가는 심심한 천국에, 누군가는 재밌는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때마다 필요한 연장 도구가 다르겠죠.
이렇게 우리의 뇌는 태어나고 나서 다듬어지는 조각상과 같습니다. 아니, 조각상 보다 계속해서 자라나는 나무가 더 적확한 표현이겠네요.
난 4세가 지났으니 망했어,라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지치기는 끝났을지라도 시냅스의 변신은 끝이 없으니까요. 시냅스 가소성, 영문을 보면 변한다는 뜻의 'plastic'이 담겨있죠. 성형외과를 plastic surgery라고 하잖아요.
나이가 들어서도 다른 일을 익히고 다른 언어를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태어난 곳에서만 살지 않아도 됩니다. 어디든 갈 수 있지요.
강연자 입장에서 가장 어려운 청중은 학생입니다.
교과목 수업도 심드렁할 텐데, 저처럼 한번 보고 말 외부 강사가 ‘청소년기 뇌신경발달’에 대해서 강의를 한다면 말 다했죠.
철저한 외면 속에서 아이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아이돌 춤이라도 춰야 되나 참담한 마음이 들지만 시냅스 가지치기 슬라이드가 나오면 급자신감이 올라옵니다.
이 순간만큼은 갑분싸 해지면서 아이들이 집중하거든요.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뉴런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매일 하는 행동이 너희들 뇌를 만드는 거야'
매일 하는 거... 핸드폰...? 게임...? 현타 온 표정이 역력합니다.
오늘 내가 한 행동이 뇌 안의 다리를 튼튼하게도 하고 약하게도 만듭니다. 다행히 한 번 잘 학습한 건 한동안 쓰지 않더라도 복구가 잘 되니 너무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 매일 텃밭을 가꾸듯이 나의 뇌를 가꿔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