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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 tea Oct 21. 2023

보랏빛 향기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봄이면 보랏빛 꽃향기가 지천에 가득합니다. 라일락 향기에 흠뻑 취할 때면 마음이 놓이다 못해 다리에 힘이 풀려 이대로 잠들겠다 싶은데요, 꽃에 진정 효과가 있다고 하네요.

라일락 향기를 맡으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동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학교 운동장에 핀 라일락을 손으로 가리키며 '이걸로 술을 담그면 맛있다'며 미소 짓던 체육 선생님.

어디서 그런 소문이 퍼졌는지, 선생님은 몇 년 전 혼자가 되셨고 주말에도 학교에 나와 계신다고 했습니다. 미군 부대에 어울릴 법한 우람한 체구에 얼굴은 늘 불콰했는데 햇볕에 그을린 것인지 술 때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겉보기와는 달리 선생님의 몸짓과 말투에는 왠지 모를 수줍음이 배어있었습니다. 좁은 교실 안에 구겨져 있다가 운동장으로 나와 한층 더 오합지졸이 된 아이들 앞에서도 절대 큰소리를 내지 않으셨죠.

학기 초에 특별활동으로 단소반에 가입했는데, 담당 선생님이 체육 선생님이어서 의외였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이 단소를 불 때면 두 손으로 잡은 단소가 피리처럼 작게 느껴졌지만, 폐활량 때문인지 타고난 감성 탓인지 구성진 곡조를 뽑아내셨습니다. 음악과 체육을 아우르는 진정한 종합 예술인이셨죠.

선생님은 풍류가였을까요. 아니면 음악과 술로 시름을 달래는 여린 마음의 소유자셨을까요? 알 길은 없지만 라일락 향을 맡으면 텅 빈 운동장 한켠 등나무 아래에서 단소를 불던 선생님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집니다.


이렇게 향기는 과거를 소환하는 강력한 주문입니다.  

어떤 향기가 코 끝에 닿으면 과거 기억과 그때 느낀 감정이 치맛자락을 끌고 오는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프랑스의 문필가 프루스트가 마들렌 향으로 불러일으킨 유년시절 기억을 아름답게 서술해 이를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하죠.

신체 내부와 외부에서 오는 모든 감각은 뇌의 깊은 곳에 자리한 시상(Thalamus)으로 모이는데요, 시상은 대뇌피질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신체 오감 중 후각은 유일하게 시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대뇌로 전달되는데, 패스트 트랙으로 비유할 수 있겠네요. 후각은 생존과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냄새를 맡고 먹을 건지 뱉을 건지, 다가갈 건지 물러설 건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냄새는 아주 작은 분자로 공기 중을 떠돌다 코로 들어옵니다. 이 냄새분자는 비강 천장에 있는 후각상피세포와 만나게 됩니다. 후각상피세포의 후각수용체에 특정 냄새분자가 결합하면 전기신호로 바뀝니다.

후각상피세포은 뇌 바닥면에 있는 구멍이 송송 뚫린 얇은 뼈를 통과해 뇌 속으로 들어가는데요, 이 구조물을 후각망울(olfactory bulb)이라고 합니다.

여기로 모인 전기신호 다발은 수렴과정을 거친 다음 위에서 말한 대로 시상을 거치지 않고 곧장 후각피질로 전달됩니다. 후각 피질에서 전달받은 신호를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냄새를 인지하게 됩니다.  

후각피질은 변연계와 가까이 있습니다. 변연계는 감정과 기억을 관장하는데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냄새를 맡으면 기억과 감정이 촉발되는 것입니다. 후각은 알면 알수록 흥미로운 감각입니다.


인간은 약 400종의 후각수용체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시각수용체는 4종류인데 반해 엄청나게 많은 수죠. 더 놀라운 건 400여 개의 수용체로 10,000개 정도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이는 냄새를 패턴으로 인식하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어, 어떤 냄새가 수용체 1, 10, 100번에 붙어 뇌로 전기신호를 보내면 갓 구운 빵이라고 인식하고 1, 10, 200번은 갓 내린 커피라고 인식합니다.

이렇게 우리 뇌는 들어온 정보의 조각조각이 모인 패턴, 인상을 해석하게 됩니다.  


뇌가 어떻게 냄새를 맡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후각과 아주 비슷합니다.

살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정보가 나라는 수용체를 통해 들어오는데요, 촉수를 섬세하게 세울수록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습니다. 정보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인상을 만들고 우리는 과거로부터 축적된 경험과 현재 상태를 통해서 그것을 해석하게 됩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오늘 내가 받아들인 정보의 해석자를 만드는 것이죠.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 속에 숨어 있는 신비는 제게 라일락 꽃향기처럼, 한번 저장된 좋은 기억은 마치 냉장고에 넣어둔 사과처럼 두고두고 꺼내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에요. 그리고 이 기억이 해석자에게 좋은 양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보랏빛 라일락 향기는 언제라도 저를 이미 지나온 유년시절의 한 조각, 시원했던 등나무 그늘 아래로 데려갈테고 저는 그 초대에 기꺼이 따라 가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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