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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 tea Oct 21. 2023

영혼에 숨 불어넣기



정신과 의사는 스트레스 관리를 어떻게 하나요?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인데요. 저는 산책과 독서라고 대답합니다. 산책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해왔고 지금도 가장 사랑하는 여가 시간입니다.

산책으로 얻을 수 있는 의학적 이점은 이미 많이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정신의학적 부분을 (따로 구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짧게 말씀드리면 산책은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트라우마 치료법으로 잘 알려진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Eye Movement Desensitization & Reprocessing: EMDR)의 창시자 Shapiro 박사는 고민이 있는 상태로 산책을 하다 그것이 해소되는 걸 경험하면서 이 치료의 영감을 받았다고 해요. 산책을 하면 양쪽 귀로 들리는 소리, 번갈아 지면에 닿는 발의 감촉과 같은 양측성 자극을 받는데요, 이 양측성 자극을 정신치료에 적극적으로 차용한 것이 바로 EMDR입니다.

설명은 이쯤으로 하고 산책의 재미를 아직 모르시는 분들에게 제 사심이 가득 담긴 산책 찬양을 해보려 합니다. 저와 함께 산책을 떠나 보실까요?


모교에서 임상교수로 근무할 때 오전 외래 일정이 있는 날엔 평상시 보다 더 일찍 출근했습니다. 정신없이 바쁜 외래 진료실로 가기 전에 병원을 둘러싸고 있는 학교 교정에서 숨을 고르기 위해서였습니다. 계절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그곳은 저의 안전기지(safety base)이자 명상의 장소였습니다.  


동트기 전, 학교 정문을 통과해 도착한 캠퍼스는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듯 고즈넉한 기운이 아침 안개와 함께 내려앉아 있습니다. 저는 느린 발걸음으로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지나 점점 더 깊은 정원으로 들어갑니다.

밤사이 교정을 밝히던 가로등 불이 하나 둘 꺼지면 일순간 주변 풍경이 모습을 감춥니다. 두 눈이 어둠에 적응할 즈음 마법처럼 숲의 신비로운 자태가 드러납니다. 멀리 그리고 가까이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와 무성하게 자란 나무가 내뿜는 축축하고 짙은 풀내음이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녹색 향기의 향연! 숲은 24시간 열려 있는 약방과 같습니다.


텅 빈 본관 계단에는 눈이 온 날이면 누군가 만들고 간 눈사람이 조용히 앉아 있기도 하고 비가 오는 날이면 부지런히 제 갈 길을 가는 달팽이를 만나기도 합니다.

늘 같은 시간 마주치는 동네 주민 몇몇이 제 곁을 스쳐 지나갈 때 즈음 저는 오르막 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깁니다.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작은 노천극장을 만납니다. 오래전 그곳에서 연극부 학생들이 올린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 공연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인생의 한 여름을 지나고 있는 대학생들이 연기하는 한 여름밤의 꿈이라니! 그곳을 지날 때마다 싱그러운 기분이 듭니다.


숨이 제법 가빠질 무렵 오르막은 끝나고 비밀의 숲에 들어온 듯 오롯이 자연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같은 길을 걸어도 매 순간 다른, 숲의 향기와 소리, 그리고 피부에 닿는 차갑고 신선한 공기 덕분에 늘 새롭습니다.

봄이면 흐드러지게 핀 아까시나무 향기에 취하고 여름에는 사방에서 짙은 초록이, 가을에는 단풍 아래로 풀벌레 소리가, 겨울에는 숨을 곳을 찾아 조심스레 움직이는 작은 생명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면서 한 번에 한 걸음씩 옮기면, 폐포 끝,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깨끗한 공기가 가득 차고 선득한 아침 이슬이 신발에 스며듭니다.


교정에서 가장 높은 곳에 이르면 저 멀리 병원이 보입니다. 이제 높이 떠오른 아침 햇살이 병원 건물 전체를 황금색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그 위로 기둥처럼 솟은 하얀 연기가 어느 인상파 화가의 그림처럼 걸려있습니다.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체온과 입김이 굴뚝으로 빠져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발걸음을 옮겨야 할 시간입니다.

건물이 빚어내는 연기에 숨을 보태러... 출발합니다!


저와 함께하는 산책, 어떠셨나요?

저는 산책을 하면서 하루를 살아갈 숨을 채우고 머릿속에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산책이 저를 치료하고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주변에 캠퍼스가 없다고 아쉬워하신다면, 제가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휴대폰 지도앱을 열어보세요. 지도에서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초록색을 찾습니다. 빌딩숲 사이에 숨어있는 초록색을 확대해 보면 근린공원이라고 표시되어 있을 거예요. 직접 가보세요.

여러분도 집에서, 회사에서 가까운 초록을 찾아 산책의 즐거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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