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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 tea Oct 30. 2022

몸이 기억하는 것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담임 선생님이 학급 성적이 떨어지자 반 아이들을 체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충격적인 건 체벌의 방법인데 직접 매를 들지 않고 짝꿍과 마주 보고 서서 서로의 뺨을 번갈아 때리게 합니다. 수치심을 느낀 아이들은 친구를 미워하고 또 자신을 미워하게 되면서 체벌이 끝납니다. 작가는 이를 두고 ‘짐승의 시간’이라 회상합니다.


가까운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폭력은 신뢰를 무너뜨리고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정폭력은 대물림되기도 하는데 학대당한 아이가 커서 가해자가 되고 심지어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과 가해자-피해자 관계를 반복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 시절을 까맣게 잊고 잘 지내다가 부모가 되면서 아픔을 재경험하기도 합니다.

아이를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다시 마주하게 되면서 복잡한 무엇이 몸을 타고 흐릅니다. 머리로는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 아니라고 알고 있지만 화를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다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상처를 줄까 겁이 납니다.

 

“아이한테 미친 듯이 화가 나요.”

 

어떤 이들은 몸이 트라우마를 기억한다고 주장합니다*. 정신의학에서 트라우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대규모 인명피해를 낸 화재 사건과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부터입니다.

참전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사람은 갑자기 심장이 뛰고, 숨쉬기 어렵고, 화약 냄새를 맡는 등 과거에 느꼈던 신체 감각을 생생하게 재경험합니다.

현재는 전쟁과 같은 참상을 겪지 않더라도 'small T'라고 일컫는, 작은 외상이 누적되는 것 또한 PTSD가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특히 아동기에 반복적으로 경험한 외상은 정신장애를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이 됩니다.

사람들은 기존의 약이나 대화 치료가 트라우마를 치료하는데 충분히 효과적이지 않다고 느꼈고 트라우마와 연관된 신체 감각과 움직임에 좀 더 초점을 맞춰야 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트라우마 치료에는 크게 두 가지 접근법이 있습니다. 바로 톱다운(Top-down approach)**과 바톰업(Bottom-up approach)**입니다.

톱다운 방식은 위에서 아래로 즉, 중추에서 말초신경으로 방향성을 일컫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이해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ural therapy: CBT)를 들 수 있습니다. 대화 치료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대물림을 ‘공격자와의 동일시’라는 개념으로 접근하기도 하며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바톰업은 조금 생소할 수도 있습니다. 아래로부터 위로 즉, 신체 움직임과 감각이 치료의 핵심이 됩니다.

대표적으로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Eye Movement Desensitization & Reprocessing: EMDR)과 Somatics***, Somatic Experience (SE)***등이 있습니다.

트라우마 치료에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EMDR은 우리가 잠자는 동안 그날의 기억과 감정을 처리하는데 이때 눈이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치료에 적용한 것입니다. 이 치료법을 개발한 Shapiro 박사는 산책을 하다 양측에서 오는 시각, 청각 자극을 통해 복잡한 생각과 감정이 해소되는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양측성 자극을 주기 위해 손가락으로 가볍게 좌우 무릎을 번갈아 두드리거나 빛 신호에 따라 좌우로 눈을 반복해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 치료는 일회성 트라우마뿐 아니라 직업상 지속적으로 트라우마에 노출되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Somatics, SE는 몸에 저장된 기억,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억을 신체 감각이나 움직임을 통해 중재합니다. 요가, 점진적 근육이완, 운동 등이 바톰업에 속하며 분노 같은 격렬한 감정의 조절을 돕습니다.

이들의 긍정적인 효과가 알려지고 트라우마 치료의 일환으로 행해지고 있지만 아직 과학적으로 충분한 근거가 축적되지 않아 향후 연구가 더 필요한 분야이기도 합니다.


상담치료를 받은 후에도 아이에게 계속해서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은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자신을 탓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학대받았던 사람이 감정 조절에 실패하는 것을 인지적 접근에서 중요시하는 통찰이 부족해서라고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그보다는 말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시기부터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어떤 트라우마는 아주 작은 것들의 누적이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의 어긋남이기 때문입니다.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접근법 모두 활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이 둘은 상호배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통찰을 지향하는 대화 치료 역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언어적인 치료 과정이 일어나고 마찬가지로 EMDR의 치료적 요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화 치료와 다르지 않습니다.


끝으로 제가 '이게 바톰업이구나'라고 느낀 경험을 말씀드리면서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요가원에서 마지막 동작으로 사바아사나(송장 자세)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눈을 감고 몸은 매트 아래 딱딱한 바닥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몸에 남은 긴장을 하나둘 풀어가던 순간 두 발 위로 무언가 느껴졌습니다. 선생님이 이불을 덮어준 것이었죠. 그때 저는 마음이 한없이 누그러지고 몸의 긴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날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의 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견 사소해 보이는 감각이 때로는 통찰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죠.

역시 따뜻한 것이 최고입니다.


*Van der Kolk, B. A. (1994). The body keeps the score: Memory and the evolving psychobiology of posttraumatic stress. Harvard review of psychiatry, 1(5), 253-265.


**한국심리학회 용어사전에 하향식(Top-down), 상향식(Bottom-up)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발음대로 표기하였습니다.


***의학용어사전과 한국심리학회 용어사전에 등록되지 않은 단어이기 때문에 원어 그대로 표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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