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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 tea Oct 30. 2022

범죄 없는 마을

그날 저는 강의가 있어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습니다. 강의 장소는 숲 속 한가운데 있었고 도착하는 곳까지 한가로운 시골 풍경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드문드문 가옥이 보이기 시작했고 마을 어귀에 모진 풍파를 맞은 듯한 이정표를 발견했습니다. 그때까지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고 약간 무서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잠시 차를 세우고 위태롭게 서 있는 이정표 가까이로 갔습니다. 그 이정표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19XX 년부터 범죄 없는 마을'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게 가능할까? 그해부터 이 마을에 사람이 살지 않고서야.... 혹시 진실을 덮는 안개가 드리워져 있는 건 아닐까. 인기척이 없는 그곳이 더 무섭게 느껴져서 서둘러 차에 올랐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어떤 경우에는 피해자가 범죄 사실을 은폐하기도 합니다. 너무 끔찍한 일이라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면 자신이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거나 그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이 파괴되어 버릴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항아리 안에 쑤셔 넣고 뚜껑으로 덮어 봉인합니다. 그러다 정말 까마득히 잊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삶에 귀 기울이다 보면 그 사람의 인생에 조용히 들어가 한 명의 목격자가 됩니다. 말하는 사람이 무색무취의 목격자와 연결되는 순간, 어떤 힘에 의해 뚜껑이 열리기도 합니다.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어요"


항아리 속에 꾹꾹 눌러두었던 과거가 지금 이 순간 입 밖으로 나오면서 저와 함께 그 사건을 다시 경험합니다. 어떤 것은 둥그렇게 소화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날 것 그대로인 것도 있습니다.


그 일을 회상하면서 위태로워진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입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한 번 더 공격받으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날개 아래 깊은 상처를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비밀을 말한다는 건 의심과 두려움이라는 터널을 뚫고 나오는 힘과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가끔 피해자의 가족이 과거에 벌어진 일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있는지 물어보십니다. 최면을 걸어 무의식 속의 트라우마까지 없애야 한다는 겁니다.


"다 말해. 다 털어버려."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을 괴롭히는 기억만 파서 없애고 싶은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범죄 없는 마을 팻말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잊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종류의 폭력과 상처를 끌어안고 여기까지 온 그 사람이 현재 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저는 그분들께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은 살아남았습니다. 


지금 제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 당신은 송곳 같은 힘으로 터널을 뚫고 나온 것입니다.

어떤 폭력도 당신의 삶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그 기억이 삶을 살아갈 때 어떤 망설임이 되고 장해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지금도 끊임없이 소화 작용을 거치고 있고 그것은 평생에 걸쳐 일어날 것입니다.

과거에 누군가 당신을 해쳤지만, 지금 당신이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그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세상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는 증거입니다.

당신은 살아 있고, 그걸로 됐습니다.

지금 소리 내어 말하기가 힘들다면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걸리는 시간이 다를 뿐입니다. 기다리세요.

범죄 없는 마을에서 살지 마시고, 기어코 이야기했을 때 다치지 않는 마을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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