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표 느낌표 쉼표의 언어

I후불제 인생_안목항 커피의 언어I

by 작가 기안장

커피는 삶의 리듬을 조절한다. 사람마다 기호를 담은 언어다. 애환이 교차하는 인생처럼 쓴맛과 단맛이 입안에 스며든다. 세상과 만나는 마음의 자리에서 어울리는 커피 한 잔, 감정과 기억을 나누는 삶의 향기가 깃들어 있다.

이런 언어는 주로 물음표와 느낌표, 쉼표로 다가왔다. 사람과 사람의 기억을 불러내며, 애틋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감정의 매개체였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궁금증을 불러냈고, 마음을 따뜻하게 데웠으며, 때론 깊은 상처를 보듬기도 했다.

나는 커피광이다. 매일 새벽, 아낌없이 커피를 내린다. 물이 끓고 원두 향이 퍼지는 동안, 한 방울씩 머그잔에 떨어지는 커피를 기다린다. 이 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평온하다. 커피를 다 내릴 때까지, 세상을 잠시 멈춰 세우고 깊은 물음 속에 잠긴다.


약 20년 전이었다. 나는 한동안 “세상은 왜 이렇게 불합리한 것일까?”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대학교수 채용에서 떨어진 후, 불운한 현실을 탓하며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좌절 속에 웅크리고 있던 내 모습이 눈에 거슬렸는지, 아내는 강릉 바닷가로 놀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 당시 강릉은 커피의 장인인 박이추 선생의 보헤미안 커피(Bohemian Roasters)가 유행하고 있었다.

남강릉으로 가는 안목항 해변에서 초콜릿 향의 신선한 핸드드립 커피를 즐길 수 있다는 입소문이 퍼져 나갔다. 아내와 나는 바다 풍경을 보며, 달콤한 한 잔의 라떼를 마시고 있었다. 단맛보다 쓴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당신, 교수 채용에 떨어진 것은 더 좋은 길을 가기 위한 거에요. 너무 좌절하지 말고 화내지도 않았으면 해요. 힘든 시간을 겪는 것은 그만큼 더 큰 일을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하잖아요.”


아내는 끊임없이 바닷가의 포말들이 들려주는 무화(無禍, 분노 없음)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나는 그 말을 삼키며 한참이나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주워 모래사장 위에 마음 한 줄을 옮겨놓았다. 아내가 바닷가의 포말들과 함께 내게 건네준 말은 ‘위로’였다. 수많은 사연을 품고 바다를 건너온 포말들의 인생 이야기처럼, 현실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야 할 삶의 물음에 대한 위로였다.


“어떤 좌절 속에 놓여 있더라도, 다시 일어나 내 길을 가자!”


그날 이후, 나에게 안목항은 사람과 사연과 시간을 품는 거대한 머그잔이었다. 먼 대륙을 건너온 포말들이 하얗게 부서지며, 전신의 전율처럼 온몸을 덮쳐왔다. 바다를 가로지른 수천 개의 거품들은 자기들만의 언어로 나를 달래 주었다. 넓은 대양을 건너 안목항에 닿기까지 숱한 사연과 좌절을 이겨낸 삶의 이야기였다.

어쩌면 안목항의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세상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깨달음의 언어인지도 모른다.

결혼기념일을 맞아, 아내와 나는 다시 강릉을 찾았다. 정동진 바닷가를 한 바퀴 돌고, 해변 길을 따라 안목항으로 올라갔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오후, 자연스레 짙은 에스프레소를 떠올렸다. 안목항 카페의 창가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으며, 아내는 따뜻한 카푸치노를, 나는 진한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커피잔 위로 부드러운 김이 피어올랐다. 아내는 그 김 속에 담아놓았던, 오래전의 기억들을 쏟아냈다.

숱한 사연을 이겨낸 마음의 언어였다. 아내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자신이 살아온 삶의 느낌을 풀어놓았다.


“아내: 오늘 커피는 좀 쓰지 않아요.”

“나: 글쎄, 커피는 좀 써야 제맛이잖아.”

“아내: 우리 인생 이야기 같아요. 쓴 날도 달콤한 날도 있었지만, 결국 모든 게 익숙해지잖아요.”


아내가 내게 전해 준 따뜻한 마음의 온도는 ‘익숙’이라는 단어였다. 오랜 시간 속에 담금질 되듯이, 단단하게 제련된 삶의 이야기라는 생각이었다. 비 오는 날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누군가의 과거와 현재를 담아놓은 느낌표를 닮았다. 아니, 오랜 시간 부부의 연대기 위에서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감의 감정이었다.

숨 가빴던 삶의 순간들을 이겨내고 숨결처럼 피어오른 진한 커피 향, 부부의 삶 속에서 피어난 한 편의 인생 서사처럼 다가왔다. 커피의 짙은 농도는 어제와 오늘을 살아가는 부부의 애틋함을 담고 있었다. 마음이 쓰라리고 쓸쓸한 날에는 습관적으로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과도 같은 감정이었다.

낯선 여행자든, 오랜 단골이든, 안목항 커피의 거리에서 모든 사람들이 같은 풍경 속에서 삶의 언어를 느낀다. 파도 소리가 잔잔한 음악처럼 깔리고, 머그잔의 부딪힘이 리듬을 더한다. 커피의 숨결만큼 마음은 따뜻해지고, 눈길이 닿는 바다는 진한 커피 색깔의 느낌표를 펼쳐놓는다.


요즘은 때때로 아이들을 데리고 안목항 커피의 거리를 향한다. 생활 속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여행코스다. 아내와 딸들과 함께, 해변가에 텐트를 치고 바다 풍경을 즐기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통해 쉼을 얻는다. 안목항은 아내와 둘만의 여행지에서, 이제는 가족 모두의 여행코스로 바뀌었다.

가족의 쉼표와도 같은 커피의 또 다른 감정적인 언어가 나부꼈다. 딸들이 카페의 거리에서 “아빠, 커피~”라며 건네준 커피 한 잔, 바닷바람에 식은 커피는 여전히 따뜻했다. 텐트 옆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원두커피였다. 바닷가에서 누릴 수 있는‘여유’와 ‘쉼’이라는 또 다른 감정의 언어가 녹아 흘렀다.

비록 커피는 식어 있어도, 함께 마시는 가족의 마음은 여전히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숨 고르기였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오늘 마시는 커피는, 어제보다 조금 더 여유롭다.”


커피의 언어는 쓴맛과 단맛을 품은 인생의 묘미이다. 수십 개의 카페들이 줄지어 서서 각자의 삶을 피워내는 곳. 안목항 커피의 거리에서 달콤한 라떼를, 진한 에스프레소를, 따뜻한 원두커피를 마시며 바다 풍경 속에서 삶을 나눈다.


“인생은 뜨거워도, 차가워도 계속해서 삶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이라고.”


안목항의 해변 카페들은 마치 서로 다른 인생 시를 읊는 시인들처럼, 저마다의 빛깔로 서사적인 애환을 꺼내 놓는다. 바다의 포말들은 여전히 흰빛으로 부서지고, 바다를 닮은 진한 커피색은 깊은 슬픔을 덮는다.

사람들은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커피 한 잔처럼, 그렇게 데워지고 식어가며 살아간다. 커피의 맛이 깊어지고 부드러워질수록, 인생의 맛도 함께 짙어진다. 젊은 날의 좌절과 아내의 위로, 그리고 가족들과의 행복이 녹아 있는 안목항 커피의 거리, 거친 파도가 인생의 잔을 채우고 비울 때마다, 나는 조금씩 부드럽게 로스팅되고 있었다. 쓴맛 뒤에 오는 그 아련한 단맛, 그것은 내가 오늘 내린 커피의 향기였다.


- 기안장 -

바다와 커피 이미지.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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