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21. 사소한 일상, 그 틈새에서 건진 기적

I후불제 인생I

by 작가 기안장



“오늘 하루가 충분히 근사한 이유는 무언가를 해냈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잃지 않고 조용히 평온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인생의 커다란 성취만이 나를 증명한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내 일상의 장부에는 “값진 성과”와 “무가치한 시간”만이 분류되어 있었다. 엄격한 잣대였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도서관으로 향하거나, 밤늦도록 기획안을 다듬는 시간만이 진짜의 삶처럼 보였다. 그 외의 시간, 예컨대 커피를 내려지는 5분의 기다림이나 멍하니 창밖 구름을 바라보는 순간은 목적지에 다다르려는 소모품이었다.

늘 값진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옥죄었다. 성과를 내면 낼수록 이상하게 마음은 더 비틀어졌다. 시내버스를 타고 경부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대방역으로 넘어갈 때였다. 길가에 노랗게 핀 4월의 개나리가 노란 비명을 질러도, 강아지가 꼬리를 살랑이며 반겨도 나는 그것을 정보로만 받아들일 뿐이었다. 내가 봄의 한가운데 서 있었을 뿐, 계절 속의 감동은 전혀 받지를 못했다.

내 삶이 너무 각박했던 탓도 있었다. 일상은 거대한 숙제 꾸러미였고, 나는 그 숙제를 해치우느라 정작 내 삶과는 분리된 망명자였다. 자신을 연소시켜 얻은 성취는 재만 남기지만, 자신을 아끼고 비축한 에너지가 내일의 빛이 될 수 있음을 몰랐다. 일요일 오후, 옥탑방 전셋집으로 공부하러 온 아이들을 배웅하고 저녁을 먹으러 노량진 먹자골목을 찾아갔다.

나는 동네 시장통의 낡은 국숫집으로 들어갔다. 세련된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만이 나를 대접하는 것이라 믿었던 오만이, 겨우 5천 원짜리 베트남 쌀국수 한 그릇 앞에서 깨어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육수를 한 모금 들이켜는 순간,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온몸의 감각을 일깨웠다.

뒤죽박죽 뒤섞여 지나가는 행인들, 투박한 시장 상인들의 웃음소리, 국수를 삶고 나르는 냄새, 그리고 빌딩 사이를 뚫고 가게 문틈으로 스며들던 붉은 노을까지. 그 순간은 성과나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오직 지금 여기에서만 존재하는 허락된 신의 선물이었다. 거대한 성과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바벨탑이었지만, 내 감각을 깨우는 사소한 일상은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였다.


그날 이후, 나는 힘껏 쌓아놓았던 바벨탑을 버렸다. 치열한 경쟁관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아침에 눈을 떠 보리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것, 반려견의 젖은 입술이 내 얼굴에 닿는 것, 그리고 그리운 사람의 샤넬 향수를 맡는 것. 이 사소한 조각들이 모여 내 삶의 거대한 모자이크를 엮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기술이란, 사소한 일상 속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시력을 키우는 일이다. 나는 늘 일상 속에서 감각을 열어놓는다. 열린 감각 속에는 수만 가지의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아침 하늘 속의 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