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를 지냈다.
평일이라 제관도 없고 울 부부 둘이서만 제사를 지냈다
제사 음식은 가득하고 먹을 사람은 없다
남편과 음복을 하며
옛 추억을 떠올린다
때는 1970년대 경상남도 어느 두메산골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그곳에 사셔서 집안행사가 있으면 두메산골 고향집으로 갔다
우리 집엔 제사가 많았다.
나의 고향은 앞도 산, 뒤도 산, 옆도 산으로 둘러 쌓인 첩첩산골이었고 8~9채가 옹기종기 모여 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같은 성씨에 같은 친족은 없었다 그러나 8~9채 사는 집 사람들은 모두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읍내에 살던 나는 그 동네에 가면 내 또래 아이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보다 조금 좋은 옷, 그들보다 조금 더 나은 신발을 신어서 일 것이다.
제삿날엔 엄마와 함께 30분 정도 완행버스를 타고 할머니집에 가면 산길 정류장에 내려 제물을 담은 대야를 머리에 이고 뒷산 오솔길을 타고 내려가면 온 동네 아이들이 할머니집 대문 앞에 쭉 서서 기웃거린다 손님이 와서 좋아서일까? 혹시나 먹을 게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을까? 사탕이나 사 가서 하나씩 나눠주며 아이들은 한 명 두 명 자기 갈 길을 가는데 그렇지 못할 때는 대문 담장에 붙박이처럼 붙어서 갈 생각을 안 한다. 그렇게 1970년대 시골마을 아이들의 모습은 가끔씩 TV에 나오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모습과 흡사했던 것 같다.
고향집에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았다.
이 집도 할머니 저 집도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한복 일복을 입으셨고 머리는 비녀를 찔러 다 할머니 같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계산해 보니 40대 후반 50대 정도의 어르신들이었다. 지금 내 나이보다 훨씬 적었던....
엄마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우물에 물을 길어 제사음식 준비를 한다고 분주했다. 솥뚜껑을 뒤집어 지푸라기로 닦아 반질반질 광을 내어선 전을 부치고 절구를 찧어 떡을 만들고 밭에 쫓아가서 나물을 캐고 삶고 무쳤다.
엄마는 항상 바빴다
여름에는 땀이 흥건할 정도로
제사는 꼭 밤 12시가 지나야 지냈다.
제물을 차릴 때 엄마가 사과를 깎으시면 그 옆에 붙어 앉아 사과껍질이 툭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껍데기에 붙은 사과를 긁어먹으려고... 제사시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는 아이들도 있었고 끝까지 제사 시간까지 기다리던 아이가 있었다. 난 왜 그토록 긴긴밤을 기다렸을까?
당연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았던 걸까?
제사를 모시고 음복시간이 돌아오면 행복 그 자체였던 것 같다.
곶감. 사과...
음복시간이 끝나고 제사가 마무리되면 제사음식을 동네 각 집집마다 제사음식을 돌러는 일이 시작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음식 양도 많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여덟 아홉 집에 음식을 돌렸을까?
뭘 어떻게 나눠서 줬을까? 대단한 분배능력이다.
대략 계산해 봐도 밤 한 시가 넘었을 시간에 남의 집을 방문하니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머리에 대야를 이고 갈라치면 호롱불을 들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린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 호롱불 들기를 자처하며 엄마의 밤길을 밝혀주던 아이였다.
신기하게도 엄마와 내가 그 집을 들어가면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뛰어나와 음식 대야를 받으며 "제사 지낸다고 고생 않았째" 하며 환히 맞이해 주셨다.
요즘은 남의 제사음식뿐 아니라 자기 집 제사음식도 꺼리는 판인데...
간혹 그 집 엄마보다 아이가 안 자고 일어나 가져간 음식을 반기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저 집에 제삿날이다. 밤에 음식을 가져다줄 것이다 안 자야지' 그런 생각으로 몰아치는 졸음을 물리친 대단한 아이다. 대부분 한 집에 아이들이 6~7명에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도저히 자기 몫으로 돌아올 수 없는 확률이지 않은가?
세월이 흘러 그 아이의 소식을 접했다
중소기업이지만 탄탄한 건설회사 사장으로 돈을 잘 벌어서 시골집을 허물고 양옥집으로 바꿔주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제사음식을 먹으며 이런 시절의 한 컷이 소롯이 기억이 난다.
없이 살던 시절이었지만 그리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