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3 전환에 속도가 붙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의 효율성을 깨달은 기업들의 뒤처지지 않기 위한 경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가상자산 시장에 대한 회의론이 팽배한 현재 역설적이게도 기업의 블록체인 기술 도입은 활발해지고 있다.
블록체인, 시스템에 스며들다
시스템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기업들은 일찍이 블록체인 관련 사업을 준비해 왔다. 포춘 100대 기업 절반 이상(52%)이 2020년부터 웹3 관련 사업을 추진했으며 이중 60%는 2022년에 이미 사업을 출시하거나 출시하는 단계에 있던 것으로 파악됐다. 그리고 2023년 현재 주요 기업들의 블록체인 관련 사업 발표가 이어지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마이크로소프트, 딜로이트 등과 함께 지난 5월부터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금융 기술 회사인 디지털에셋과 함께 진행하는 이 프로젝트는 주식이나 채권 같은 전통 금융의 토큰화를 통해 결제 속도를 높이는데 집중하고 있다.
자체 프라이빗 블록체인을 구축한 시티은행은 9월 18일 기관 고객의 빠른 송금을 지원하는 토큰 서비스를 출시했다. 자체 네트워크로 운영되는 서비스이기 때문에 별도의 지갑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 고객은 서비스에 블록체인이 사용됐는지 알 필요 없이 빠른 송금 서비스를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
기관이 아닌 개인 대상 서비스도 있다. 동남아의 슈퍼앱으로 알려진 그랩(Grab)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인 서클과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이들은 9월 17일부터 음식 배달, 차량호출, NFT 보관 등이 가능한 웹3 지갑을 시범 운영 중에 있다. 동남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앱인 만큼 서비스가 성공적으로 운영된다면 일반 소비자들의 웹3 인프라 사용이 본격화될 것이라 생각된다.
국내에서는 현대카드와 SK플랫닛이 NFT 콘서트 티켓 판매를 시작했다. 아직 실험적으로 진행 중인 서비스지만 고질적인 문제인 불법 암표 근절에 효과가 있다면 관련 업체들은 물론 대중의 선택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서비스다.
비용 절감 효과
이 외에도 다양한 서비스들이 준비 중이지만 대체로 금융 시스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기존 결제/거래 시스템의 비효율성과 한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다.
가령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카드나 페이류의 결제 수단은 ‘가맹점 → 결제대행사 → 카드사 → 가맹점’이라는 복잡한 단계를 걸쳐 진행된다(해외결제는 더 심하다). 증권이 거래되는 자산시장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직접적인 거래에서는 불필요한 수수료가 현재 시스템에서는 단계마다 발생한다.
블록체인 인프라 도입은 이러한 복잡한 과정과 수수료 비용 절감에 도움이 된다. 서비스 방식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결제대행사와 카드사의 역할이 하나의 과정으로 합쳐지거나 아예 사라지기 때문에 결제 정산이 빨라진다.
비자(Visa)는 서클의 스테이블코인인 USDC를 결제에 도입했다. 만약 이용자가 USDC로 결제를 진행한다면 카드사를 통해 승인과 결제를 진행했던 기존 방식과 달리 비자가 직접 정산을 해주기 때문에 8일이 걸리던 정산 기간을 4일로 단축시킨다. 여기에 더해 카드사에 지불되던 수수료도 사라지기 때문에 서비스/제품의 효율을 높일 수 있게 된다(해외 결제의 경우 환전 비용도 절감된다).
다른 네트워크와 협업하는 비자와 달리 골드만삭스와 JP모건 같은 거대 기업들은 자신만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거래 비용 최적화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시장을 선점하기 위함도 있다. 최적화된 비용과 편리한 인터페이스를 가진 금융 플랫폼이 시장 점유율을 독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인터넷은행이 간편 송금과 같은 편리함 등으로 전통 은행을 위협했듯, 이제는 블록체인을 도입한 금융기업이 기존 기업을 위협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격차는 통장이체와 모바일 송금의 간격보다 클 것이다.
기회와 한계
블록체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인프라 구축이 최우선이다. 포춘 기업 임직원 500명을 대상으로 진행 또는 고려 중인 블록체인 사업 계획을 설문한 결과 블록체인 인프라 구축이 가장 높았으며 데이터 수집 및 관리, 결제 시스템 순 등으로 높았다.
기업은 이더리움, 에이다, 솔라나와 같은 기존 네트워크를 선택해 비용을 절약할 수도 있다. 비용 절약과 설비 투자 리스크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선택이다. 그러나 확신이 있는 기업일수록 자체 메인넷 구축을 선호할 것이다. 또한 특정 메인넷을 활용한다고 해도 기존 시스템과의 상호작용성과 다른 메인넷과의 상호운용성도 고려해야 하기 대문에 블록체인 인프라에 대하 투자는 필수다.
블록체인은 분산 기록이라는 장점 외에도 데이터에 고유성을 부여한다. 소비자 데이터 활용이 가속화되고 있는 지금의 디지털 시장 속에서 블록체인을 통한 소비자 데이터의 분류 및 분석은 새로운 비즈니스 창출 기회는 물론 기업 전략 수립을 위한 필수 툴이 될 것이다. 이외에도 스마트컨트랙트를 통한 시스템 자동화, 자산의 토큰화, 유통 관리 등 다양한 블록체인 사업들이 준비 중에 있다.
이처럼 블록체인 기술 도입에 대한 가능성과 기회가 포착되고 있지만, 섣불리 도전하긴 어렵다. 500명의 포춘 기업 임직원들은 기업이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는데 가장 큰 벽으로 ‘투자에 대한 성과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을 꼽았다(62%). 블록체인 사업을 위해서는 기존 시스템을 교체해야 하기 때문에 초기에 막대한 자본이 투입된다. 그런데 만약 블록체인 도입 후의 수익률이 기존과 같거나 낮다면 기업으로서는 블록체인을 도입할 유인가가 전혀 없다.
두 번째는 불명확한 규제(46%)다. 유럽은 지난 5월 가상자산 포괄 규제법인 미카를 통과시켰고 한국도 6월 가상자산 법안을 의결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백서의 기준이나 투자자 보호 장치들만 제정되었을 뿐 아직 구체적인 법안들이 통과된 상태는 아니다. 또한 미국은 각종 가상자산 소송들로 시끄러운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은 마음 편이 블록체인 사업을 시작하기 어렵다.
블록체인 관련 사업이 수익이 되지 않는다면 기업이 블록체인을 도입할 이유는 없다. 또한 불명확한 규제 속에서 자칫 잘못하면 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는 리스크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주요 기업들은 블록체인을 점차 사업에 적용하고 있다. 블록체인을 도입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리스크보다 더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가며
지금까지는 코인을 앞세운 투기성 짙은 사업들이 남발했다면, 이제는 실질적인 유틸리티에 집중된 상품/서비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블록체인의 대중화가 얼마 남지 않았단 생각이 든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대중화는 대중이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에 열광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일상에 스며듬을 의미한다.
카르다노의 창시자인 찰스 호스킨스는 “사람들이 블록체인인 것을 모르고 사용할 때 비로소 대중화가 이뤄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치 우리가 출근길에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이유가 무역(원두 공수), 냉장장비(보관), 결제기술(판매) 등의 복합적인 혁신이 모여 이뤄진 것처럼 블록체인을 통한 혁신 또한 인류에게 새로운 일상을 가져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