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 생존기18.

-온국민이 베르나르베르베르에 빠져있던 대한민국을 기억하는 당신께.

by noodle

솔직히 말하면, 지금 나는 가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전부 고갈된 기분입니다. 아침까지만 해도 기운차게, 오늘의 글감을 떠올리며 내심 흐뭇하게 뼈대를 그려놨었는데, 사춘기를 맞이한 11살 첫째의 이유모를 눈물 바람에, 뭐하나에 꽃히면 포기를 모르는 둘째의 징징거림에 혼이 쏙 빨린 너덜너덜한 한마리 애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나에게 주어진 1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1시간이 채 되지 않는 50여분. 첫째가 눈물을 달고 피아노에 가고, 둘째가 입 댓발나와 클라이밍에 간 이 황금같은 50분. 하루 종일 이미 충분히 넘치게 들이킨 커피를 생각하며, 평소 생각지도 않는 디카페인 커피를 시켜봅니다.

하소연하고 싶은 이야기나 실컷 풀어볼까 잠깐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따끈따끈한 지난 주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지난 토요일, 우리 책방에 굉장한 손님이 오셨었거든요. 책방을 찾는 한분 한분 손님이 모두 귀하고 소중하지만, 책방을 통해 유명한 사람을 마주할 때의 울림은 또 다른 결로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베르나르베르베르라는 작가를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이 있을까요? 아, 요즘 젠지들에게는 어떤지 잘 알지 못합니다만, 저처럼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고 2000년대 초반 학번을 달고 대학 생활을 한 사람들이라면, 아마 대부분 그 이름이 익숙하리라 생각합니다. 개미, 타나토노트, 신, 나무, 뇌, 아버지들의 아버지...

어릴적 책을 꽤나 좋아했던 언니의 책장에 소중하게 꽂혀 몰래 훔쳐보아야만 했던, 표지의 푸른 빛 마저도 신비롭고 흥미로웠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도 그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오랫만에 상기해냈네요. 생각해보면 그 시절 우리는 그 작가의 작품들에 꽤나 열광했던 것 같습니다. 시절이, 프랑스 문학의 한국 전성기였달까요? 내가 어린 시절, 맘졸이며, 숨죽이며 읽어내려갔던 이 작품들을 직접 발굴해서, 우리에게 소개한 이세욱 번역가님께서 책방을 찾아주셨습니다. 베르나르의 작품 외에도 이탈리아 문학, 일본 문학까지 번역한 번역서가 무려 100여권에 달하신다는... 번역계의 전설같은 분.

인생의 선배처럼 도란도란 들려주신 이야기가 마음을 울렸습니다.

사실 그동안 여러 번역가님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소외되는 마음이 한켠에는 늘 있었습니다. 찾아주신 손님들이 대부분 번역에 관심이 있는 책방 언니의 제자들과 지인들인데다가 프랑스어에 능통한 분들이다보니, 까막눈인 내가 조금은 주눅이 들 수 밖에요. 하지만 이세욱 번역가님의 시간은 조금 달랐습니다. 번역의 이야기를 인생에 빚대어 해주셨달까요. 나는 62년생 그 분의 열정에 용기에 마음씀씀이에 깊게 감동받았습니다. 한 줄의 번역을 하기 위해 번역 기행을 가신다는 이야기도, 누군가에게는 뜬구름처럼 느껴졌을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진심과 공감으로 울렸습니다. 구지 필요하지 않은 소모적인 일을, 그 한장면의 이해를 위해서 소설 속 장소를 찾아가신다는 번역가님. 인세가 이루어준 그의 재력이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할 그 기행을 가능하게 한 것인지, 아니면 특별한 기행이 번역가님께 남다른 인세를 가져다 준 것인지 그 인과 관계를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이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고 믿고 싶었어요.

한명 한명 정성들여 메모해주시고 화답해주시는 모습은 너무나 감동이었습니다.

진심이, 애정이, 열정이, 그 분께 명예 뿐 아니라, 부도 가져다 주었다고요. 언젠가는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싶다는 바램을 가득 담아서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 멋진 어른은 나에게 진심어린 화답을 들려주셨습니다. 바르셀로나의 비오는 거리에서 번역가님께 드릴 선물을 고민하며 초콜렛을 골랐는데, '김미연 선생님께 전해주세요. 선물로 주신 바르셀로나 <수리부엉이>가 너무나 맛있어요. 마치 제가 초콜릿 좋아하는 것을 잘 아시기라도 하듯.. 나중에 아주 맛난 음식으로 은혜를 갚고 싶어요.'라고 그날 저녁을 함께 한 책방 언니에게 메세지가 날아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있나봅니다. 여기 책방 리브레리에, 내가 있나봅니다. 오래도록 여기에 남아서 언젠가, 이세욱 번역가님처럼 어리고 젊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오후였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사온 초콜릿 맛있게 드셔주셔서요.

월요일 연재
이전 08화책방지기 넋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