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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원 주미영 Aug 20. 2023

북벌군주 효종, 여주
영릉(寧陵)

 깨어진 꿈이었을까? 꾸지 않은 꿈이었을까? 

같은 현실을 봤으나 다른 꿈을 꿨던 사람

청나라를 정벌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재위 10년을 보냈으나 끝내 사그라진 북벌의 꿈... 

그것은 정녕 꿈이었을까?     




필자가 오늘 만나볼 사람은 조선 제17대 왕 효종뜻하지 않게 임금이 된 조선왕이 몇 명 있는데 효종도 그중 한 사람이다효종의 대군 시절 이름은 봉림대군. 그의 형이 소현세자다두 형제는 병자호란 때 아버지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직후 인질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다.     


청나라에 머무는 동안 형과 동생은 중국 대륙에서 일어난 왕조의 교체를 목격했다조선이 떠받들던 명나라가 변방의 오랑캐로 여겼던 청나라에 의해 무너지는 과정이다. 이에 대한 두 사람의 판단은 정반대였다소현세자가 현실을 인정하고 청과 서양의 문물을 배워 부국강병 하자는 개혁개방의 길을 선택한 반면봉림대군은 조선과 명나라의 원수인 청나라를 응징해야 한다는 신념을 품게 된다소현세자가 예정대로 인조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됐다면 봉림대군의 신념은 그저 마음속 생각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인질에서 풀려나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으면서 봉림대군은 형의 뒤를 이어 세자에 책봉됐고 그 3년여 후 아버지 인조의 사망과 함께 왕위에 올랐다. 


효종은 즉위 후 조선의 국방력 강화를 추진했다북벌에 뜻을 같이하는 이완박서 등을 중용하고 오늘의 대통령 비서관에 해당하는 승지에 무인을 기용했다주력 부대인 어영청과 훈련도감 군사 수를 늘리고 국왕 친위부대인 금군은 기병으로 탈바꿈시켰다남한산성 수어청을 보강하고 각 지방에 지휘관을 파견해 지방 군사력을 강화했다이와 함께 조총과 화포 등 무기 체계를 발전시키는데도 힘썼는데 제주도로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이 무기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다.


아버지 인조는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었을지언정 친청파 대신들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했지만 효종은 북벌 신념을 정책으로 구현해 가며 차근차근 국방력을 키워갔다그러던 중 효종 5년에 청나라로부터 군사 지원 요청이 왔다나선이라고 불리던 러시아 부대와 싸울 군사였다조선은 이때 조총부대 100여 명을 파견해 러시아 군대에 승리했다그 5년 후 같은 요청이 오자 또 200여 명을 보내 러시아군을 물리쳤다비록 적은 수의 군사가 참전한 작은 전투였지만 나라 밖으로 군대를 보내 승리를 일군 값진 경험이었다.     


이렇게만 보면 효종이 내세운 북벌의 꿈은 곧 이뤄질 것만 같았다하지만군사력이 강화되는 성과를 일부 낸 것 외에 북벌즉 청나라를 정벌한다는 기치는 실제로는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당시 집권 서인 세력의 협조를 받지 못한 게 큰 요인으로 송시열송준길을 영수로 하는 서인의 산당 계열 신하들은 국방력 강화가 민생에 해를 준다며 반대했다그러면서도 민생에 도움이 되는 대동법 확대 실시에는 반대했고 사대부 집단의 부담을 늘리는 군포 징수 개혁도 좌초시켰다서인 산당 세력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금과옥조로 여겼으니 복수설치(復讐雪恥), 즉 복수를 하여 치욕을 씻는다는 북벌과 궁합이 잘 맞았다하지만 이들의 북벌은 관념적 구호에 머물렀을 뿐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않았다.     


이렇게 북벌이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모르는 9년 세월이 지나고 지방에 머물며 조정 신료들의 실질적 지휘자 역할을 하던 송시열이 조정에 나왔다그러나 그는 북벌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책을 내놓지 않았다그저 임금이 몸과 마음을 바로 닦아야 한다는 말 그대로 공자 말씀이 전부였다. 

 

이때 효종과 송시열이 승지와 사관을 내보낸 가운데 둘 만의 대화즉 독대를 하게 되는데 이때의 대화 내용이 송시열이 훗날 쓴 책에 기록돼 있다북벌에 대한 효종의 강한 의지가 곳곳에서 드러나 있다.


 정예화된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기회를 봐서 저들이 예기치 못하였을 때에 곧장 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송자대전 송서습유 7악대설화    

 

나는 주색을 끊고 경계하여 가까이하지 않은 결과... 늘 정신이 맑고 몸도 건강해졌으니... 하늘이 나에게 10년의 기간을 허용해 준다면 성패와 상관없이 한번 거사해 볼 계획이니경은 은밀히 동지들과 의논해 보도록 하오.”      


이에 대한 송시열의 대답은 이랬다


제갈량(諸葛亮)도 능히 성공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 세상사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만에 하나 차질이 있어 국가가 망하게 된다면 어찌하시렵니까?”     


이 독대가 있은 후 두 달 후에 효종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의원이 침을 놓았는데 피가 멈추지 않아 숨을 거두고 만다그의 나이 41즉위한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의문사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효종은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한 후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구역에 묻혔다가 능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14년 후 세종대왕릉이 있는 경기도 여주시 영릉(영릉)으로 옮겨졌다.심양으로 함께 끌려가 동고동락했던 부인 인선왕후도 곁에 묻혀 있다

경기도 여주의 영릉 (효종과 인선왕후)

그런데 봉분이 옆으로 나란히 있는 다른 왕릉과 달리 효종릉이 위쪽에 있고 인선왕후릉이 아래쪽에 위치한 동원상하릉 형식을 띠고 있다. 풍수적인 요인에 따른 봉분 배치다.     


효종은 북벌 군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실제로 청나라로 쳐들어가려고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훗날 여러 논란이 있다앞서 기해독대에서 송시열이 말한 것처럼 청나라와의 전면전은 자칫하면 나라가 망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효종이 북벌 관련 발언을 한 사실은 신하들의 전언 형식으로 실록에 일부 나오지만 구체적 논의나 지시가 없었다


서인을 포함해 당시의 대다수 사람들은 명나라를 제압하고 중국 대륙의 승자가 된 청나라와 전쟁을 벌인다는 데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조선으로서는 또 다른 대규모 전쟁을 치를 만한 여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효종이 정통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의 이념으로 북벌을 내세웠다는 분석을 하기도 한다형인 소현세자가 비명에 가고 그다음 보위를 소현세자의 장남이 이어야 함에도 적장자가 아닌 효종이 잇게 된 것이니 정통성이 취약했고 그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내걸었다는 것이다. 이런 기치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는 서인 세력의 지향점과 맞아떨어졌으니 효종과 서인 세력은 한 배를 탈 수 있었다. 하지만 양측 누구도 실제로 말 달리고 화포 쏘면서 청나라를 정벌할 생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효종이 조선의 허약한 군사력을 강화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한 것은 분명하다


군포 개혁과 대동법 확대 등 민생을 돌보기 위한 정책도 추진했다반면에 당시 집권 세력이던 서인은 군비 증강과 민생 개혁에 소극적이었다한 손으로는 교조화된 성리학 이념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기득권을 지키는데 몰두했다. 효종 이후 청나라는 더욱 강대해졌고 북벌은 말 그대로 꿈으로 남게 됐다윤휴 등 일부 남인 신하들이 북벌론을 이어갔지만 현실적 힘을 갖지 못했다.   

       

북벌론으로 불꽃같은 10년을 보낸 효종 임금! 그에게 북벌은 ‘깨어진 꿈’이었을까, ‘꾸지 않은 꿈’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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