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과 명성황후, 순종의 무덤에서
필자가 오늘은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홍릉과 유릉을 찾았다. 조선 왕릉 중 왕보다 더 격이 높은 황제의 무덤으로 조성된 곳으로 여느 왕릉과 달리 들어가는 문부터 웅장하다. 먼저 홍릉으로 향했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능의 모습이 그동안 탐방했던 왕릉과는 매우 다르다. 향로와 어로 좌우에 여러 동물 석물이 늘어서 있는데 다른 왕릉 능침에 있던 석마 외에도 낙타, 해치, 사자, 코끼리, 기린 같은 동물 석상이 자리 잡고 있고 무석인과 문석인이 그 끝에 우뚝 서 있다. 봉분 앞에 있던 석물의 상당수가 아래로 내려와 있는 형태다. 그리고 제향이 행해지는 왕릉의 중심 건물 정자각이 있는 자리에는 일자 형태의 웅장한 건물인 침전이 자리 잡고 있다. 명나라 황제릉을 참고하고 조선왕릉의 전통을 계승해 대한제국식 황제릉을 조성했다.
홍릉에는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과 그의 부인 명성황후가 잠들어 있다. 고종은 25대 왕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실 어른인 신정왕후가 종친 중에서 선택했다. 이 과정에 고종의 부친이던 흥선대원군이 막후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살에 즉위한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위세에 눌려 오랫동안 실질적 임금 역할을 하지 못했다. 즉위 후 10년이 지나 22살이 됐을 때 최익현의 상소와 함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비로소 실질적 통치를 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흥선대원군은 역사의 고비마다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며 아들과 며느리인 명성황후 민 씨와 갈등을 빚었다. 고종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야욕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대내적으로는 흥선대원군과 민 씨 외척 세력 간의 대립,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등으로 혼란한 시기를 헤쳐 나가야 했다. 하지만 국내외에서 일어나는 격동의 파고를 넘지 못한 채 주권 상실의 치욕을 당하게 된다.
명성황후는 고종 즉위 3년 후 왕비로 간택됐다. 흥선대원군은 외척 세력을 경계해서 일부러 정치적 힘이 없는
집안 출신으로 왕비를 골랐다. 하지만 민 씨는 흥선대원군과 대립하며 죽을 때까지 정치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다. 16살에 중전이 되어 고종 못지않은 존재감을 보여온 명성황후는 45살에 궁궐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건청궁 내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는 일본인들에게 살해된 후 시신까지 불태워졌다.
궁궐에서 왕후가 피살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지만 진상조사와 처벌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장례식은 2년여 후에 치러졌다. 사건 당시 불에 탄 시신의 일부가 수습돼 있었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는 서울 동대문구 홍릉에 조성됐었다. 지금 홍릉수목원이 있는 곳이다. 고종이 홍릉을 오갈 때 이용하려고 전차가 처음 개통되기도 했다.
명성황후의 장례식이 치러지기 직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왕은 황제가 되고 왕후는 황후가 됐다. 국가의 정체성을 새롭게 해서 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시도였지만 바람 앞의 촛불 같던 나라의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대한제국 선포 10년 후 고종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폐위당하게 된다. 을사보호조약의 불법성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것이 빌미가 됐다. 일본은 고종을 폐위시키고 당시 34살이던 순종에게 보위를 넘겼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의 유일한 아들인 순종은 어려서부터 병약한 데다 25살 때 아편이 다량 들어 있는 커피를 마시게 된 ‘독차사건’으로 건강을 크게 해쳤다. 여기에 아버지 고종만큼의 경험과 정치력도 없었기에 허수아비 같은 황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순종이 즉위한 지 3년 후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돼 멸망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지 518년에 맞은 망국이었다.
경술국치와 함께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으로, 순종은 창덕궁 이왕으로 불리며 치욕 속에서 살았다. 나라를 빼앗기고 9년 후 고종은 식혜를 마신 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재위 44년, 68살이었다.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는데 민중의 분노가 쌓이면서 고종 장례일을 계기로 전국적인 반일 저항운동이 확산됐다. 3.1 운동이다. 망한 나라의 군주였을 망정 국민들 사이에 상징적 존재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고종이 사망하자 지금의 남양주 홍릉에 황제릉 공사가 재개돼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릉에 안장됐다. 동대문구 홍릉에 있던 명성황후가 이때 남편 곁으로 옮겨왔다. 영욕의 세월을 함께 한 고종과 명성황후가 24년 만에 혼백이 되어 같은 자리에 누운 것이다.
순종은 아버지 고종보다 7년을 더 살다 53살에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번에도 장례일에 맞춰 학생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니 6.10 만세운동이다. 서울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된 이 저항운동으로 학생 천여 명이 체포됐다. 변변한 역할조차 하지 못한 허울뿐인 군주였지만 이때까지도 임금은 민족의 구심점으로 남아 있었다.
순종의 무덤은 홍릉 옆에 역시 황제릉으로 조성됐다. 이름은 유릉이다. 유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봉분 하나에 세 사람이 안장된 동봉삼실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순종과 첫 번째 부인 순명황후, 두 번째 부인 순정황후가 모셔져 있다. 유릉은 홍릉과 기본 형식이 같지만 동물 석물들이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된 점이 눈에 띈다.
홍릉과 유릉 일대에는 고종 일가와 관련된 무덤이 여러 기 자리 잡고 있는데 홍유릉 경계를 10여 분 걸어가니 '영원'이 나타났다. 영친왕으로 잘 알려진 의민황태자와 부인 이방자 여사가 묻혀 있다. 의민황태자는 고종과 후궁 순헌황귀비의 아들로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 일본군으로 복무했다. 두 사람은 1963년 대한민국에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에서 거주했다.
영원 옆에는 '회인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의민황태자의 둘째 아들이자 황세손이던 이구씨의 무덤인데 건축가로 활동한 그는 2005년 일본에서 숨진 후 이곳 부모 곁에 묻혔다. 숲길을 걷다 보니 덕혜옹주 사진들이 걸려 있고 이윽고 그녀의 묘가 나타났다. 소설과 영화로 잘 알려진 덕혜옹주는 고종과 후궁 귀인 양 씨의 딸이다.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고 결혼해 딸까지 낳았으나 정신병원에 입원해 지내다가 1962년 귀국했다. 창덕궁에서 27년을 보낸 후 세상을 떠나 이곳에 잠들어 있다.
덕혜옹주묘 근처에는 의친왕묘가 있다. 고종과 후궁 귀인 장 씨 사이의 아들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야트막한 산속으로는 후궁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산책길을 따라가니 고종의 후궁 3명과 의친왕의 후실 2명의 묘가 차례로 나타났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없는 곳에 망국의 역사를 보고 겪은 이들이 고즈넉하게 잠들어 있다. 궁녀로 입궁했다가 고종의 후궁이 된 삼축당묘를 끝으로 홍유릉 권역에는 황제릉 2기, 원 2기, 묘 7기가 있다.
홍유릉은 조선왕조가 그 끝을 향해 시시각각 기울던 시절 황제부터 이름 없는 왕실 여인까지 오욕의 세월을 견디다 간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그들과 대화하며 오늘의 우리가 새겨야 할 역사의 교훈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