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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원 주미영 May 25. 2023

왕위 찬탈자의 무덤, 광릉

세종대왕이 사랑한 아들은 어떻게 학살자가 되었나? 

그저 왕의 아들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사람!  

친형제와 조카를 죽이고 권력을 손에 쥔 사람!

세월이 지나고 또 지나도 ‘왕위 찬탈자’라는 오명에 짓눌려 있는 사람!    

 



조선 제7대 왕 세조의 무덤을 찾던 날, 부슬부슬 봄비가 대지를 적셨다.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광릉은 죽엽산 자락 울창산 숲 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에 포함돼 있을 정도로 우수한 식생을 자랑한다.


광릉 또한 조선왕릉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돼 있으니 유네스코 2관왕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광릉에 들어서면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하마비를 볼 수 있다. 


“대소인은 말에서 내려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이곳의 위엄을 보여준다.    


빽빽이 솟아 있는 활엽수림 사이를 10여 분 걸어 올라가니 왕릉의 입구라는 표시인 홍살문이 모습을 나타냈다. 위쪽으로 경사가 올라가는 지형이어서 정자각이 더욱 우뚝 서 있는 듯한데 정자각의 왼편 언덕에는 세조의 능이 자리하고 있고 오른편 언덕에 정희왕후의 능이 자리 잡고 있다.     


세조는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큰아들 문종이 적장자로 왕위를 이었지만 2년여 만에 승하하고 12살 단종이 임금이 되자, 단종을 보위하던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는 형식으로 조선의 제7대 임금이 되어 13년을 다스린 후 52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조를 따라다니는 가장 핵심적인 말은 ‘왕위 찬탈자’라는 단어다. 그가 자행한 잔혹한 살상 행위는 대부분 왕위를 빼앗고 지키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는 계유정난이라는 군사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 세종과 형 문종이 아끼던 신하들을 대거 죽인 것은 물론, 친동생 안평대군도 죽였다. 김종서 등 고명대신들이 단종을 끌어내리고 안평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다는 역모 혐의를 뒤집어 씌운 것이다.  


세조와 종종 비교되는 태종 이방원도 이복형제들은 죽였을지언정 친형제들을 해치지는 않았다. 태종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복동생들인 세자 방석과 방번을 없앴지만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자신에게 직접 칼을 들고 맞선 바로 윗 형 방간을 사형 대신 유배를 보내 천수를 누릴 수 있도록 했다. 방간을 처형하라는 상소가 이어졌지만 태종은 끝까지 그를 보호했다.      


세조가 죽인 친형제는 안평대군뿐만이 아니었다. 세조가 왕이 된 후 사육신 사건 등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운동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이 운동에 친동생인 금성대군이 가담하자 그 역시 사약을 내려 죽였다. 조선 역사에서 친형제를 두 명이나 죽인 왕은 세조가 유일하다. 이후 세월이 흘러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이 유배 중 사사된 일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조선 왕실에서 이복형제들 간에 죽고 죽이는 사건은 많았지만 친형제의 목숨을 뺏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는 점에서 세조의 비정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세조는 또 단종복위운동과 연루시켜 아버지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 씨와 그녀의 아들 영풍군을 죽였다. 후궁이지만 엄연히 아버지의 부인이었는데 그녀와 함께 그녀의 자식이자 자신의 이복동생까지 없애버렸다. 친모는 아니었지만 서모를 죽인 것 역시 조선에서는 패륜이었다. 단종의 유일한 혈육인 경혜공주는 단종보다 5살 위 누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세상을 떠나 의지할 데 없던 단종은 임금에 있으면서도 종종 누나 집을 찾곤 했다. 1453년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키던 날 밤에도 단종은 궁궐이 아니라 누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경혜공주의 남편은 정종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단종과 친해 수양대군 측의 미움을 샀다. 결국 세조는 그를 단종복위운동에 연루시켜 유배 보냈다가 후에 능지처참시켰다. 동생 단종과 남편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본 경혜공주는 결국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세조의 칼끝은 형님인 문종의 아내 현덕왕후 권 씨와 그 가족으로도 향했다.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된 혐의로 현덕왕후의 어머니와 동생 권자신을 처형했고 이미 사망한 상태였던 현덕왕후는 서인으로 격하시켰다. 그 후 중종 때에 이르러서 왕후로 복권됐다. 현덕왕후는 구리 동구릉 내 현릉에 남편 문종과 함께 묻혀 있는데 이렇게 남편 곁으로 오기까지 72년이나 걸렸다. 현덕왕후가 꿈에서 세조에게 침을 뱉어 피부병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야사다. 여기에 더해 전해져 오는 유명한 이야기는 동자승과 관련된 야사다. 


하루는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를 가던 길에 맑은 계곡을 만나 몸에 난 종기를 보이지 않으려고 혼자 떨어져 몸을 씻고 있었는데 동자승 하나가 보이기에 등을 씻어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왕의 몸을 씻어줬다는 얘기를 하지 마라”라고 얘기하니 그 동자승도 “왕께서도 문수보살을 직접 봤다고 얘기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자 피부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감동한 세조가 그때 본 동자승을 그대로 그리게 해 보살상을 만들었는데, 바로 국보로 지정된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이다.(국보 제221호)      


가족과 친인척, 대신들의 피를 밟고 왕이 된 세조, 그렇다면 통치자로서는 세조는 어땠을까? 세조 통치의 핵심은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먼저 3정승의 권한을 약화시켜 조정에 대한 왕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6조 직계제를 시행했다. 국왕이 의정부 정승들을 거치지 않고 각 부처를 직접 지휘하는 이 제도는 왕권 강화의 핵심 제도였다. 조선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던 집현전을 없애고 왕과 신하들이 현안을 토론하는 경연 제도도 폐지했다. 이와 함께 지방 군을 강화해 국토 방어 체계를 개선하고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해 국가 통치 규범을 만드는 데도 힘썼다. 


하지만 강화된 왕권에 기생하는 공신 세력 역시 막강해졌다. 한명회, 신숙주를 두 축으로 하는 공신들은 왕의 강력한 비호를 받았는데.. 특히 일개 말단 궁지기에서 쿠데타의 브레인으로 권력 핵심이 된 한명회는 자신의 두 딸을 세조의 아들(예종)과 손자(성종)에게 시집보내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반대자를 용납하지 않는 국왕, 그 왕과 한 몸이 되다시피 한 외척.. 이런 구도는 세종과 문종 대에 성숙시켜 놓은 문치의 틀을 허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세조의 가장 결정적 문제는 그에게 정통성이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왕위 찬탈자'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숨을 거뒀고 지금도 ‘조카를 죽이고 임금 자리를 빼앗은 왕’,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정체성이다.     


세조는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도성 안에 원각사를 짓고, 오대산 상원사 중창에 참여하는 등 유난히 불사에 열심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업보를 씻기 위한 행보는 아니었을까? 세조는 건강이 악화돼 당시 세자였던 예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바로 다음날 52세로 사망했다. 자신이 미리 정해놓은 능자리에 묻혔고 15년 후에 부인 정희왕후가 옆 언덕에 안장돼 오늘날의 광릉 모습이 되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고 병풍석도 세우지 마라”라고 유언했다. 석곽은 나무 관을 둘러싸는 돌로 된 상자이고 그 석곽을 넣은 돌로 만든 방이 석실이다.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후에는 돌 대신 회격이라는 재질로 대신했고, 봉분 아랫부분을 육중한 돌로 둘러싼 병풍석도 없앰으로써 공사를 간소화하고 백성들의 노역을 줄였다. 왕릉은 보통 백성 만 명 가까이 동원돼 4~5개월 동안 조성되는 대규모 토목공사로 공사 중 사망자도 속출하는 등 폐단이 지적돼 왔기 때문이다.

 

광릉에서 나오면 왼편으로 데크길이 하천 옆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이 길을 따라 약 2km 걸어가면 봉선사라는 사찰이 나온다. 여느 절과 달리 멋진 연못이 조성돼 있어서 공원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원래 이 절의 이름은 운악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세조가 죽자 왕비 정희왕후가 왕의 위업을 기리고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절을 개축하고 이름도 봉선사로 바꿔지었다. 그러면서 느티나무 하나를 심었는데 수 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서 해마다 푸른 잎을 내고 있다.     


세종대왕은 왕비 소생 아들만 8명을 낳은 아들 부자였다. 아들들은 아버지를 닮아 하나같이 총명했다. 그리고 조선 개국 이후 처음으로 장남 문종에게 왕위를 넘김으로써 첫 적장자 세습을 이뤘다. 하지만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그 똑똑한 아들 중 하나가 형제들을 죽이고 친인척을 도륙한 걸 안다면 어떤 심정일까? 저승에서 할아버지 태종과 아버지 세종을 만난다면 세조는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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