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간 여인들
임금의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간 여인들...
여인들의 운명과 함께 조선의 권력도 춤을 추고...
그 시대의 주인공들은 말없이 300년을 잠들어 있는데...
필자는 지난 6월 3일 주말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오릉을 찾았다. 도성의 서쪽에 있는 다섯 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구리 동구릉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조선 왕릉군이다. 왕릉 다섯 기와 원 두 기, 그리고 묘 한 기 등 여덟 기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서오릉에는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의 묘가 처음 자리 잡았고, 이후 조선 제19대 왕 숙종과 그의 여인 4명이 차례로 안장되면서 지금은 누구나 알만한 사극드라마 주인공들의 무덤이 됐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명릉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명릉에는 숙종과 그의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와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가 모셔져 있다. 제관이 향을 들고 가는 향로와 임금이 걸어가는 어로는 다른 왕릉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신하들이 걷던 변로도 남아 있다. 원래 봉분이 위치한 능침 구역은 일반인이 출입하지 못하는데 필자는 사전에 허가를 받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었다.
정면에서 보기에 왼편에 숙종, 바로 옆에 인현왕후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숙종은 아버지 제18대 왕 현종의 외아들로 14살에 왕위에 올랐다. 인현왕후는,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가 20살에 사망하자 두 번째로 책봉된 왕비다. 인현왕후는 왕비가 된 후 8년 만에 폐비돼 궁에서 쫓겨났다. 폐비되기 7개월 전에 일어난 한 사건이 큰 영향을 줬다. 바로 후궁 희빈 장 씨, 즉 장희빈이 숙종의 아들을 낳은 것이다.
28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첫아들을 본 숙종은 이 아이를 서둘러 원자에 책봉하고 세자로 삼았다. 이어 인현왕후를 내쫓고 장 씨를 왕비로 올렸다. 인현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했다지만 숙종은 왜 무리해서 왕비를 내쫓았을까? 숙종과 두 여인 간의 삼각관계보다 더 근원적인 요인이 있었다. 바로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당시 당쟁에 깊숙이 얽혀 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장희빈은 당시 야당 격인 남인 세력에 속해 있었고 인현왕후는 집권당 격인 서인 세력의 구심점이었다. 서인에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가문이 즐비하고 남인보다 세력이 훨씬 강했다. 서인 입장에서 장희빈이 낳은 세자 역시 남인이었고 그래서 제거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인 우위의 정치 구도를 그대로 뒀다가는 세자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 후사를 이어 종묘사직을 보존하는 게 최우선인 숙종에게는 서인 세력을 정리할 강력한 동기가 있었다. 그래서 숙종은 서인 왕비인 인현왕후를 내치고 서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송시열을 제거한 것이다. 기사환국이라고 불리는 이때의 권력 교체를 통해 남인이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며 집권당이 됐다.
하지만 이런 남인 정권은 5년 만에 무너지고 만다. 숙종이 주도한 갑술환국이라는 정권교체를 통해 이번에는 남인이 물러나고 서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때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귀하고 왕비였던 장희빈은 후궁인 희빈으로 내려앉게 된다. 남인과 서인 간 정권교체와 맞물려 왕비 교체가 일어난 사실이 말해주듯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갈등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임금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여인들의 싸움보다는 당파 간 권력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숙종은 46년간 임금으로 있으면서 환국이라고 불리는 이런 인위적인 정권 교체를 세 차례 실시해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임금이 필요에 따라 집권당을 선택해 조정을 완전히 바꿔버림으로써 여당에게는 선을 넘지 않고 권력을 행사하도록 하고, 야당에게는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주면서 신하들의 복종을 이끌어냈다.
숙종과 인현왕후가 묻혀 있는 곳에서 떨어져 왼쪽 언덕에 인원왕후의 능이 자리 잡고 있다. 인현왕후가 궁에 다시 들어온 지 7년 후 사망하자 숙종이 그다음 해에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인원왕후는 숙종이 죽고 37년을 더 살아 71세까지 천수를 누렸는데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이, 역모 사건에 몰려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끝까지 보호해 줘 영조에게는 은인과 같은 사람이다.
울창한 숲 사이로 난 산책길을 따라 10여 분 걸어가니 익릉이 나타났다. 익릉은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를 모신 단릉이다. 숙종과 세자 시절 혼례를 올려 세자빈이 됐고 남편이 왕이 되면서 왕비로 책봉됐으나 20살 때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숙종의 왕비 3명은 공교롭게도 왕비들에게는 모두 자식이 없었다. 인경왕후가 딸을 낳기는 했지만 일찍 죽었고 누구도 왕위를 이어받을 왕자를 낳지 못했다. 숙종에게 아들을 안겨준 첫 번째 여인은 장희빈! 서오릉의 첫째가는 유명인사이지만 희빈장 씨의 무덤은 지금까지 본 왕릉과는 다르게 초라한 모습이다. 대빈묘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원래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가 경기도 광주시로 옮겼고 1970년대에 이곳 서오릉으로 옮겨왔다.
장희빈은 통역관 집안 출신으로 이름은 장옥정이다. 말단 궁녀 생활을 하다 숙종의 승은을 입어 왕자를 낳고 정실 왕비까지 된 입지전적인 여인이다. 궁녀 출신 왕비는 조선에서 장 씨가 유일하다. 궁녀 때 둘의 관계를 눈치챈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에 의해 궁에서 쫓겨났지만 명성왕후가 죽자 다시 숙종의 부름을 받았다.
이런 상황을 보면 장 씨에 대한 숙종의 사랑이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숙종의 변심으로 다시 후궁으로 강등됐다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혐의로 사약을 받고 죽는다. 그녀는 당시 서인과 대립하던 남인 세력의 상징이었다. 폐비돼 죽임을 당하자 남인도 무너졌다. 장희빈의 죽음 뒤에는 숙종의 새로운 연인 숙빈 최 씨가 있었다. 숙빈 최 씨가 장희빈의 혐의를 숙종에게 고해바치자 격분한 숙종이 장 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여성 편력만으로 보면 숙종의 마음은 인현왕후에서 장희빈으로, 이어 또 다른 후궁 숙빈 최 씨에게로 갔다. 그래서 말년의 숙종은 다음 보위를 장희빈 소생 세자보다 숙빈 최 씨가 낳은 훗날의 영조, 연잉군에게 넘기고 싶어 했다. 가까스로 장희빈 소생 경종이 왕위를 이었지만 단명했고, 그 뒤를 숙빈 최 씨 소생 영조가 이어받아 52년간 최장수 임금을 지냈다. 결국 장희빈의 등장과 추락, 인현왕후의 추락과 재등장, 숙빈 최 씨의 급부상 등은 숙종의 애정행각이 당시의 정치적 변수와 복합적으로 맞물리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숙종과 그의 여인들이 서오릉의 대표이기는 하지만 이곳에는 제8대 왕 예종을 모신 창릉, 예종의 형인 의경세자와 부인 인수대비를 모신 경릉,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 씨의 수경원, 영조의 첫 번째 왕비였던 정성왕후의 홍릉 등 500년 조선왕조 물줄기와 함께 흘렀던 인물들이 잠들어 있다.
울창한 숲에 깨끗하게 조성된 산책길을 걸으며 무덤의 주인들과 먼 옛날이야기를 나눠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