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대 스펙터클, 정조가 수원에 가던 날
조선 제22대 왕 정조대왕의 특별한 여정이 10월 8일 시작됐다. 8일에 걸쳐 수원 화성을 다녀오는 일정이다.
재위 후반인 정조 19년(1795년)에 이뤄진 이 능행은 더욱 특별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회갑 잔치를 화성에서 베풀기 위해 홍 씨도 동행했기 때문이다.
이 행렬은 정조 임금은 물론 대소 신료와 왕실 가족, 호위 군사, 궁녀들까지 6천 명이 참여했다. 1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진 행렬은 그 규모와 화려함에서 조선 최고의 장관을 만들어냈다. 창덕궁을 나온 행렬은 용산에서 노량진으로 한강을 건넜다. 지금의 한강대교가 놓여 있는 위치이다. 그런데 6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이 넓은 한강을 어떻게 건넜을까? 그 답은 강에 임시 교량을 설치한 것이다. 36척의 배를 띄워 고정시키고 그 위에 널빤지와 잔디까지 깔았다. 덕분에 행렬은 흐트러짐 없이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 배다리를 설계한 사람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정약용이다.
시흥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이튿날 행렬이 도착한 곳은 수원의 화성행궁이다. 행궁은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했을 때 머무는 곳을 일컫는데 화성행궁은 조선의 다른 행궁들과 비교해 규모나 기능 면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화성행궁에서 국왕의 행차를 기념한 특별 과거시험도 보고 백성을 위한 잔치도 열었다. 이번 행차의 목적 중 하나가 혜경궁 홍 씨의 회갑 기념이었던 만큼 그녀를 위한 잔치 역시 더할 나위 없이 성대하게 열렸다. 수원이 이렇게 정조 임금의 특별한 장소가 된 것은 조선 왕실 최대 비극과 연결돼 있다. 바로 사도세자 사건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누르던 어느 날, 필자가 사도세자를 만나러 갔다. 경기도 화성시 융릉이다. 융릉에는 훗날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와 부인 혜경궁 홍 씨가 잠들어 있다. 고종 때 왕릉으로 격상되기 전까지 이곳은 세자의 지위에 맞춰 현륭원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 영조에 의해 비극적 죽임을 당한 후 사도세자는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 묻혔었다.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절규했던 11살 어린아이는 25살 어엿한 청년이 되어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즉위 13년째 되던 해에 아버지의 무덤을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화성으로 옮겼다. 조선 제일의 명당이라고 하는 곳이다. 그 이후 정조는 해마다 한차례 이상 아버지를 찾아왔다. 정조의 능행은 이렇게 시작됐고 수원과의 인연도 맺어졌다. 지금은 수원과 화성이 분리돼 있지만 정조의 능행과 함께 수원이라는 이름이 화성으로 바뀌어 100년 이상 사용됐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찾을 때마다 손톱이 뜯어지도록 땅을 움켜쥐며 오열했다.
‘피눈물이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실제로 그것을 임금에게서 봤다...’
한 신하는 이렇게 증언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 씨와 함께 화성행궁에 도착한 정조는 이틀 후에 어머니를 모시고 현륭원을 찾았다. 혜경궁 홍 씨는 사도세자가 죽은 후 33년이 지나 이때 처음으로 남편의 무덤을 찾게 된 것이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
이 날로부터 꼭 20년이 지나... 혜경궁 홍 씨도 세상을 떠나 한 봉분 아래 남편 곁에 묻혔다.
어머니와 함께 현륭원을 참배하고 화성행궁으로 돌아온 정조는 그날 낮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화성 일대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정조의 지휘 아래 3천7백 명의 국왕 친위 부대인 장용영 군사들이 신기전과 불랑기포를 동원해 실전을 방불케 하는 군사훈련을 밤새 이어갔다. 정조와 대립해 온 신하들에게는 공포스러운 무력시위였다. 장용영은 노론 가문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기존 5 군영과 달리 정조가 직접 뽑아 기른 정예 무사들로 구성돼 있었다. 무과로 뽑은 30명에서 시작해 만 8천 명 규모의 대부대로 성장해 국왕 권력을 뒷받침했다.
군사훈련의 무대가 된 수원 화성은 화성행궁을 포함해 도심을 에워싼 5.7킬로미터 길이의 성곽이다. 사도세자 무덤에 정조가 참배하러 온 것을 계기로 화성행궁이 갖춰진 것처럼 화성 역시 정조가 이 지역을 오가며 구상한 신도시의 핵심 시설이다. 정조는 화성을 군사적 대비가 갖춰지고 상업 기능과 관개 농업이 활성화된 새로운 개념의 신도시로 건설하고자 했다. 화성의 설계와 시공 책임 역시 정약용이 맡았다. 성곽 건설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일종의 도르래인 거중기가 사용됐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파손됐으나 성곽의 설계도와 작업 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 그 독창성이 인정돼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정조 임금의 꿈이 깃들어 있는 화성은 지금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자 시민 누구나 쉽게 접근해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매력적인 산책 코스로 자리 잡았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임금의 행렬은 이틀에 걸쳐 궁궐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는 올 때 하지 않았던 특별한 일을 했다. 바로 백성들의 민원을 직접 접수하는 상언과 격쟁이었다. 상언은 글로 쓴 민원이고 격쟁은 글 모르는 백성이 꽹과리를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다. 정조는 능행 귀환길에서 이렇게 접수한 민원을 궁에 돌아와 검토한 후 해결책을 지시했다. 정조 임금은 24년 재위 기간에 능행을 66번 갔다. 한 해 평균 2.75번인데 인조부터 영조까지 전임 왕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이다. 정조는 능행길에서 상언과 격쟁을 통해 밑바닥 민심을 청취하고 생업 현장의 모습을 직접 관찰했다. 일종의 민생 탐방 행사이기도 했는데 재위 기간 능행길에서 접수한 격쟁 1,300여 건을 처리했다.
정조 재위 19년, 어머니와 함께 화성행궁에 다녀온 때는 초기의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나 국정 운영에 자신감이 붙었을 때였다. 규장각을 통해 인재들을 양성했고 장용영으로 군사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5년 후 정조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재위 24년, 49살이었다. 드세고 노회한 신하들의 견제를 넘어서서 조선 후기 재도약의 불씨를 지피려던 때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 융릉 서편 언덕에 모셔져 있다. 건릉이다. 원래 동쪽 언덕에 안장했다가 순조 임금 때 옮겼다. 부인 효의왕후는 21년 후 숨져 합장릉에 함께 모셔졌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내뱉은 일성이다. 오랜 세월 금기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사도세자가 비로소 그 아들에 의해 밝은 빛 아래로 나올 수 있었다. 즉위 후 부친을 추숭 하는데 한시도 관심을 꺼본 일이 없는 정조의 행동을 보노라면 죽는 순간까지 정조는 뒤주에 갇힌 아버지에게 물 한 잔을 올릴 수 없었던 11살 소년의 시간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는 그 참혹한 경험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 극한의 고통을 누르고 누르며 복수와 자기 파멸이 아닌 애민 군주의 길을 걸어갔으니... 비 내리는 어느 날 만난 정조 임금께 가만히 고개를 숙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