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오늘은 고양 서삼릉을 찾았다.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를 모신 희릉, 그녀의 아들인 제12대 왕 인종과 인성왕후를 모신 효릉, 제25대 왕 철종과 철인왕후를 모신 예릉 등 왕릉 세 기가 있어 서쪽에 있는 삼릉이라는 뜻으로 서삼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런데 서삼릉은 왕릉뿐 아니라 왕의 탯줄과 태반을 보관한 태실, 왕자와 왕녀 22명의 묘, 후궁들의 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 씨의 묘 등 조선 왕실 인물들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다양한 모습을 접할 수 있는 독특한 장소다. 이 가운데 오늘은 정조 임금과의 러브스토리로 유명한 성덕임, 의빈 성씨에 대해 소개해 보겠다.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서삼릉 입구에서 약 1.8킬로미터 떨어진 태실 권역으로 향했다. 태실과 왕자. 왕녀묘, 숙의 묘역을 차례로 지나면 빈. 귀인 묘역이 나온다. 이곳에 의빈 성씨를 포함해 후궁 16명이 모셔져 있다.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조성된 묘들을 서삼릉으로 옮겨온 것이다. ‘의빈창녕성씨지묘’라는 비석과 함께 조그만 봉분이 놓여 있는데 이 아래에 정조 임금이 사랑했던 성덕임이 잠들어 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성덕임은 10살 무렵에 궁궐에 들어갔다. 덕임의 부친이 혜경궁 홍 씨의 부친인 홍봉한 집에서 청지기 일을 한 것이 인연이 돼 입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혜경궁 홍 씨는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후 혜경궁 홍 씨는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아들 정조는 친모와 떨어져 경희궁에서 생활하게 됐고, 두 딸도 출가해 궁을 나갔다. 이에 혜경궁 홍 씨는 어린 성덕임을 가까이에 두고 적적함을 달랬다.
성덕임이 14살 되던 해, 세손으로 있던 정조가 승은을 내려 동침하기를 청했다. 그러자 그녀는 “세손빈이 아직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으니 감히 명을 따를 수 없다”며 거절했다. 보통 궁녀들은 승은 입기를 고대하는데 세손빈을 염려해 동침을 거부했으니 매우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정조는 그 뜻을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15년이 흘렀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다시 성덕임을 찾았다. 그러자 그녀는 같은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이때까지도 왕비는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조도 물러나지 않았다. 성덕임의 노비를 꾸짖고 벌을 내렸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동침을 허락했는데 이때 아이를 가져 이듬해에 아들을 낳았다. 정조가 30살이 되어 얻은 첫아들이었으니 얼마나 기뻐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궁녀 신분이던 성덕임은 소용 직분을 받으며 후궁이 됐고 3개월 후에는 정1품 빈 직위를 받아 의빈이 됐다.
아기는 태어난 지 2개월 만에 원자에 책봉되고 두 돌이 채 되지 않아 왕세자에 책봉됐으니 바로 문효세자다. 하지만 유일한 왕위 계승자이던 문효세자는 불과 다섯 살에 홍역에 걸려 죽고 만다. 아들이 죽고 큰 충격을 받은 의빈 성씨 역시 그로부터 다섯 달 후에 세상을 떠난다. 그녀 나이 34살이었다. 이때 그녀의 뱃속에는 임금의 다른 아이가 잉태돼 있었다. 임금과 궁녀의 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슬프고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정조는 성덕임이 승은을 거절한 일, 오래 기다리던 아들을 낳은 일, 왕세자 생모라고 으스대지 않고 중전에게 지극정성을 다한 일 등 그녀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기쁨과 슬픔의 순간, 그리고 의빈 성씨의 따뜻한 성품을 직접 기록해 남겼다. ‘어제의빈묘지명’이라는 이 기록이 있었기에 후세 사람들은 왕실에서 펼쳐진 사랑 이야기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이 기록에서 정조는 의빈 성씨가 길쌈도 잘하고 요리도 잘했는데 붓글씨 솜씨는 범상한 수준을 넘었다고 썼다.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성덕임이 글씨를 잘 쓰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실제로 궁녀이던 21살 때 정조의 두 여동생, 다른 궁녀들과 함께 필사한 한글소설 ‘곽장양문록’이 남아 있어, 지금도 그녀의 글씨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성덕임
의빈 성씨는 죽으면서 먼저 간 아들 문효세자 곁에 묻히고 싶어 했다. 그 뜻이 이뤄져 서삼릉에는 문효세자의 무덤도 있다. 효창원이다. 모자는 원래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묻혀 있다가 일제 강점기 때 지금의 서삼릉 자리로 함께 옮겨왔다.
후사가 끊긴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가 죽자 이듬해 다른 후궁을 들여 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가 정조 뒤를 이어 임금이 된 제23대 왕 순조다. 정조가 성덕임에게 끝까지 일편단심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왕실에서는 후사를 잇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니 이해해야 할까?
냉정하게 보면 성덕임도 다른 왕들의 여인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궁녀로 있다가 왕의 눈에 띄어 사랑받고 자식을 낳은 여인이야 흔히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왕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음모와 암투 이야기가 넘쳐나는 삭막한 조선 왕실에서 임금과 궁녀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