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그는 도대체 왜 임금이 되었을까?
무력으로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으나...
재위 26년간 조선에 치욕과 고통만을 안겨줬으니...
그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임금이 된 것일까....
오늘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장릉을 찾았다. 조선 제16대 왕 인조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가 묻혀 있는 곳이다. 인조는 선조의 후궁 소생 아들이 낳은 아들, 그러니까 선조의 서손이다. 광해군 시절, 동생인 능창군이 역모 혐의로 유배 갔다가 자살하고 아버지도 화병으로 죽자, 광해군에 대한 복수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복수심과 서인 세력의 정치적 이해가 맞아떨어진 사건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인조는 1623년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등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임금 자리에 올랐다. 인조와 서인 세력은 광해군이 법적인 모친인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는 패륜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 그리고 명나라에 사대의 예를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정변의 명분으로 삼았다. 오직 명나라에만 충성해야 하는데, 광해군이 당시의 떠오르는 신흥 강자인 여진족의 후금과 화친 정책을 펼친 것을 문제 삼았다. 후금은 조선 사대부에게는 오랑캐였다. 반정 세력의 이런 친명, 반 후금 정책은 훗날 조선에 큰 참화를 불러왔다.
광해군 시절 집권당인 대북 세력을 쓸어낸 인조와 서인 정권은 얼마 가지 않아 내부 균열에 봉착한다. 1년이 채 되지 않아 정변의 주역 중 한 명인 이괄이 평안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파죽지세로 관군을 격파하고 한양을 점령했다. 인조는 이때 한양을 버리고 허겁지겁 충청도 공주의 공산성으로 피신했다. 조선 역사에서 변방의 반군이 수도를 점령하고 왕이 도피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반군은 한양에 입성해 새 임금을 옹립할 정도로 기세를 떨치다가 진압됐다.
이괄의 난이 일어난 지 3년이 지나 이번에는 후금이 침입했다. 정묘호란이다. 누르하치가 죽고 새 지도자가 된 홍타이지는 조선 영토 안에서 활동하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제거하고 조선을 쳐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해 3만 명의 군사로 조선을 침략했다. 인조는 또 한양을 떠나 강화도로 피신했다. 나라가 망할 가능성에 대비해, 소현세자가 임시 조정을 꾸려 전라도 전주로 내려갈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다. 오랑캐로 업신여기던 후금에 굴복해 형제의 관계를 맺은 후에야 조선은 비상사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광해군의 친 후금 정책을 반정의 명분으로 내걸었던 인조와 서인 정권으로서는 치욕이자 자가당착이었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명나라의 쇠락, 후금의 상승세는 뚜렷했다. 하지만 조선의 집권 세력은 이런 변화에 눈감았다. 명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의리였고, 후금에 복수하는 것이 대의였다. 하지만 복수를 위해 군사력을 기르지도, 나라의 체계를 가다듬지도 않았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에 등극했다. 청 태종이다. 이에 조선의 사대부는 오랑캐가 감히 황제를 칭한다고 격분했다. 이들에게 황제는 오직 명나라 황제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청나라 군대는 정묘호란 후 10년 만에 다시 압록강을 건넜다. 10만에 이르는 대군이 평안도, 황해도의 성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빠르게 남하했다. 인조는 다시 짐을 쌌다. 이번에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는데청군의 빠른 진격 속도 때문에 방향을 틀어 남한산성으로 황급히 피신했다. 한겨울 남한산성에서 만 3천 명의 군사와 조정 대신들, 백성들이 사투를 벌였으나 45일 만에 항복했다. 인조는 지금의 서울 송파구에 해당하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아래에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 의식을 행했다.
항복과 함께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갔다. 조선 백성 수십만 명도 함께 끌려갔다. 인조와 서인 집권 세력이 국제정세를 무시하고 국익과 정반대의 노선을 걷는 바람에, 나라는 이른바 오랑캐의 속국이 되고 국토는 약탈의 대상이 되었으며,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이후 청은 명을 멸망시켜 중국의 주인이 됐다.
중국 대륙의 주인이 바뀌는 과정을 목격한 조선의 최고위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다. 소현세자는 명분과 신분질서에 집착하는 성리학의 한계를 봤다. 천주교와 서양 문명에도 눈을 떴다. 소현세자에게 인질로 있던 8년은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는 기간이었다. 청과의 유대 강화, 서양 문물의 도입을 통한 부국강병이 그 지향점이었다. 이는 청나라에 깊은 원한을 안고 사는 인조나 성리학 원리주의에 빠져 있는 조선 집권 세력과는 크게 달랐다. 그래서일까. 소현세자는 조선에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34살 건장한 세자의 죽음을 기록한 실록의 한 대목이다.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와...
그 얼굴빛을 분변 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인조실록 23년 6월 27일)
의혹의 중심에는 인조가 있었다. 이례적으로 간소하고 짧게 장례를 치른 점, 어의 이형익을 감싸고 돈 점 등이 정황으로 제시된다. 인조는 또한 청나라와 관계가 좋은 세자에 게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청 황제가 자신을 폐하고 세자에게 보위를 주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을 후계자로 정하지 않고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원칙과 관례에 맞지 않는다며 대다수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인조가 밀어붙여 관철시켰다.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적개심은 이어 세자빈에게로 향했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내인 강빈이 자신에게 독을 탄 복어구이를 올렸다고 누명을 씌워 사약을 내려 죽였다. 강빈의 친정어머니와 오라비도 죽였다. 그리고 소현세자와 강빈 사이의 어린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이들 중 첫째와 둘째 아들이 제주도에서 죽었다.
이렇듯 인조는 재위 전반부에는 나라와 백성을 전란의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치욕의 나날을 보내더니, 후반부에는 개혁 사상을 품은 친아들 소현세자와 그 가족을 몰살시키는 극도의 잔인함을 보였다. 이런 오욕의 날들을 보낸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고 4년 후 55살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원래 인조의 무덤은 파주의 다른 장소에 조성됐는데 무덤에서 뱀과 전갈이 나오는 등 흉지로 드러나 영조 때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봉분이 여느 왕릉에 비해 무척 크게 조성돼 있어서 눈길을 끈다. 인조 이후 조선은 폐쇄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격동의 세월을 겪게 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일 소현세자가 왕이 되어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라를 이끌었다면 그 이후의 우리 역사는 어떻게 펼쳐졌을까 하는 아쉬움을 달랠 수 없다.
문득 370여 년 말없이 지하에 잠들어 있는 인조 임금에게 묻고 싶어 진다.
"임금님! 도대체 왜 임금이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