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떠보니 임금님, 그는 정녕 행운아였나?
여름 더위가 기세를 올리던 1849년 7월 어느 날...
한적한 섬 강화도에 으리으리한 행렬이 들어왔다.
행렬은 골짜기와 논밭, 마을 사이로 수 킬로미터에 걸쳐 길게 이어졌는데...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이 이 행렬을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강화도 북동쪽 허름한 초가집으로 향했다.
이곳에 살던 19살 총각 이원범을 왕으로 모셔가기 위해서였다
필자가 강화도의 그 초가집을 찾아갔다. 초가집 대신 기와집이 들어서 있고 대문에는 용흥궁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농사꾼으로 살던 이원범이 조선 제25대 왕 철종으로 즉위하자 4년 후 왕의 생가답게 번듯하게 조성하고 이름도 붙인 것이다. 현재는 내전 한 동, 외전 한 동, 별전 한 동 해서 3채가 남아 있다. 용흥궁 안쪽에 있는 외전에서 서쪽으로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가니 비각이 하나 있다. 비각 안에 있는 비석에는 ‘철종조잠저구기’(哲宗朝潛邸舊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철종이 살던 개인집, 즉 잠저가 있던 자리라는 뜻이다.
조선왕 중 예상치 못하게 임금이 된 사람이 몇 명 있는데 그중에서도 철종은 가장 얼떨결에 즉위한 임금이라고 할 수 있다. 철종 직전 24대 왕 헌종이 15년간 임금 자리에 있다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조선 초기에는 왕실에 후사를 이을 아들들이 많았는데 후기에 들어서면서 후손이 귀해졌다. 왕의 아들이 한 명 혹은 두 명으로 아슬아슬하게 종사가 이어지더니 헌종 대에 이르러 왕비 소생이든 후궁 소생이든 직계 아들이 완전히 끊어져버린다. 결국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 연결고리가 있는 혈통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선택된 인물이 철종이었다. 왕실과 철종과의 관련성은 증조할아버지인 사도세자로까지 올라간다. 사도세자와 후궁 숙빈 임 씨 사이의 아들인 은언군, 그 은언군의 첩의 아들인 이 광, 그 이 광의 첩의 아들이 이원범이었다.
철종을 흔히 강화도령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가 강화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강화도 토박이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철종은 서울에서 태어나 14살까지 살았다. 그러다 큰 형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면서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됐다. 강화도에서 평범한 백성으로 5년을 살다가 갑자기 왕으로 선택된 것이다. 철종의 집안은 할어버지 은언군부터 대대로 역모 사건에 휘말려 있었다. 그 불온한 집안의 후손이 왕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규모 행렬이 그를 왕으로 모시기 위해 왔을 때도 철종은 자신을 잡으러 오는 줄 알고 산속으로 도망가기도 했다.
철종을 왕으로 선택한 사람은 왕실의 큰 어른이던 순원왕후 김 씨였다. 순원왕후는, 후임왕 철종이 전임왕 헌종의 아저씨 뻘 되는 항렬 역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종을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순원왕후는 당시 안동 김 씨 세도 정치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안동 김 씨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철종처럼 함량 미달 인물을 선택했다는 추론도 있다. 하지만 후손 풀이 워낙 적어서 선택의 폭이 별로 없었다는 반론도 있다.
어쨌든 왕실 종친이라고는 하나 궁궐 옆에도 가 본 일이 없고 기초 교육 정도 겨우 마친 수준이었으니 국왕으로서의 자질과 역량은 매우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순조 때부터 이어온 안동 김 씨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면서 중앙부터 지방 권력까지 쥐락펴락하던 때였으니 철종처럼 하루아침에 왕이 된 사람이 헤쳐나가기에는 더욱 어려운 여건이었다. 순원왕후가 철종 즉위와 함께 3년간 수렴청정을 한 후 내려왔지만 ‘힘없는 왕’의 처지는 그대로였다. 철종을 왕에 앉힌 순원왕후는 안동 김 씨인 철인왕후를 왕비로 간택했다. 이로써 안동 김 씨 가문은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중전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의 60년 세도정치는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와해됐다.
안동 김 씨의 권력이 커질수록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중앙 관료부터 지방 수령까지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전정, 군정, 환곡을 지칭하는 삼정의 문란이 극심해 원래 나라의 재정 정책이자 빈농 구제 제도이던 것이 백성에 대한 수탈 도구로 전락하다시피 했다. 강화도에 살면서 농민들의 피폐한 삶을 직접 겪었던 철종은 삼정의 문란에 대해 여러 차례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현재 3정(三政)이 모두 병들어서 민생(民生)이 고달프고 초췌해졌다. 그중에서도 적정(환곡)은 가장 백성의 뼈에 사무치는 폐단이 되었다.... 심지어 나누어 주지도 않은 곡식을 독납(독촉하여 징수) 하니, 슬프다. 우리 백성들은 장차 무엇으로 생계를 꾸리겠는가?” (철종실록 4권, 철종 3년 10월 22일)
“탐관오리(貪官汚吏)의 해로움은 홍수(洪水)와 맹수(猛獸) 보다 심하여, 우리 백성을 수탈(收奪)하며 우리 백성을 파산(破産)시키면서 자신을 살찌우고 사사를 경영함은 온 세상의 풍조(風潮)가 모두 그러하다. 슬픈, 우리 호소할 데 없는 백성들이 마침내 굶어 죽어 구렁을 메웠다...” (철종실록 6권, 철종 5년 1월 25일)
하지만 안동 김 씨 세상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철종에게는 왕이라는 이름은 있을지언정, 권위도 세력도 없었다. 전임 헌종 때는 안동 김 씨 세력을 누르기 위한 시도라도 있었지만 철종 때는 이 씨 왕조인지, 김 씨 왕조인지 모를 상황이 지속됐다. 마침내 학정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났으니 경상도 진주를 시작으로 전라도, 충청도까지 삼남 지방을 휩쓴 임술봉기였다.
곳곳에서 백성들이 관아를 습격해 수령을 욕보이고 아전들을 죽였다. 철종은 임술봉기를 계기로 삼정의 개혁을 추진했다. 이를 위한 기구인 삼정이정청도 설립했다. 하지만 삼정이정청을 구성하는 관료들이 대부분 안동 김 씨를 비롯한 세도가들이었다. 개혁 대상에게 개혁을 맡긴 셈인데 잘 될 리가 없었다. 결국 3개월 만에 삼정이정청이 폐지되고 개혁도 흐지부지되면서 조선은 더욱 병들어갔다. 마음은 있으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임금, 철종은 갈수록 국정에서 멀어지고 대신 술과 여색을 가까이하며 스스로 무너져갔다. 결국 19살 젊고 강건했던 청년은 용상에 오른 지 14년 6개월 만에 병든 몸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왕의 나이 33살이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어느 날, 필자가 철종을 만나러 갔다. 철종은 경기도 서삼릉 내 예릉에 잠들어 있다. 부인 철인왕후는 14년을 더 살다가 남편 곁에 안장됐다. 철종은 철인왕후와 후궁 여섯 명을 부인으로 뒀다. 5남 6녀를 낳았으나 숙의 범 씨에게서 낳은 영혜옹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릴 때 죽었다. 영혜옹주 역시 박영효에게 시집갔으나 결혼 3개월 후 14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철종의 혈육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
예릉은 국조오례의와 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해 조성된 마지막 조선왕릉이다. 이후의 고종릉과 순종릉은 기존 조선왕릉과는 크게 다른 대한제국 황제릉의 형식을 취했다. 철종이 왕으로 있었던 1800년대 중반은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서양 나라들이 과학기술과 군사력으로 무장해 동양에 진출하던 시기였다 이런 서양 세력 앞에 중국은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다. 이런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조선은 총체적으로
갈 길을 잃고 말았다. 길 잃은 조선에서 우연히 역사의 무대 앞에 불려 나온 철종,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득 궁금해진다. 흙투성이 청년이 임금의 옷을 입고 임금의 가마를 타고 강화도를 떠나던 날은 그에게 행운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