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찬탈자 세조의 왕비, 아름다운 퇴장
남편과 세 자식을 먼저 보낸 비운의 여인...
조선의 첫 수렴청정으로 임금의 권력까지 대신했으나..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떠났으니...
필자가 오늘 만나볼 사람은 조선 제7대 왕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다. 경기도 남양주 깊은 숲에 자리 잡은 광릉에 남편 세조와 함께 묻혀 있다. 세조는 조카 단종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했다는 점 때문에 후세에 비판의 대상이 됐지만 정희왕후는 세조의 정치적 동반자였음에도 긍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정희왕후는 명문 파평 윤 씨. 하지만 정희왕후가 어릴 때에는 부친이 벼슬도 높지 않았고 부정축재 혐의로 징계를 받는 등 가세가 많이 기울어 있는 상태였다.
정희왕후가 세조와 혼례를 하게 된 경위를 송와잡설은 이렇게 전한다. 정희왕후가 11살이던 어느 날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이던 수양대군의 배필을 찾기 위해 궁궐의 감찰각시가 집에 방문했다. 원래 수양대군의 배필 후보는 언니였는데 신부 면접 자리에 동생인 정희왕후가 끼어들었고 범상치 않은 기상을 본 감찰각시가 언니 대신 동생을 추천했다고 한다.
정희왕후는 혼인 후에 시부모인 세종과 소헌왕후의 이쁨을 받았는데 특히 세종의 장남인 문종의 부인들과 큰 대조를 이뤘다. 세자 시절 문종의 첫 세자빈이었던 휘빈 김 씨는 남편의 사랑을 받아보겠다고 해괴망측한 사술을 부리다가 발각돼 쫓겨났다. 그 다음에 세자빈으로 간택된 순빈 봉 씨는 여종과 동성애를 벌인 사실이 드러나 역시 폐위됐다.
이렇게 장남의 며느리 문제로 골치를 썩인 세종과 소헌왕후는 행동이 바르고 웃어른을 잘 모신 정희왕후를 좋아해 두 아들을 궁궐에 들어와 출산하도록 배려했다. 세자를 제외한 왕의 아들들은 혼인을 하면 궁궐을 나가 사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궁궐에서 출산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조선의 첫 장자 임금이던 문종이 재위 2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12살 어린 단종이 뒤를 잇자 수양대군은 한명회 등과 모의해 김종서를 비롯한 친 단종 신하들을 대거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바로 계유정난! 거사를 일으키던 날 밤 정희왕후는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입혀주며 결단을 독려했다고 한다. 당시의 일반적인 아내의 모습이 아니라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행동이었다.
정희왕후에 대한 세조의 신뢰는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왕으로 재위하는 동안 크고 작은 행사에 부인을 대동했고 주요 현안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지극 해서였는지 상남자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게 세조는 조선왕 중 유난히 후궁을 적게 둔 왕이기도 하다. 기록상 3명을 둔 것으로 돼 있는데 아버지 세종은 9명을 뒀고 할아버지 태종의 후궁은 무려 19명이나 된다.
정희왕후와 비교되는 인물이 태종의 부인 원경왕후다. 태종과 세조는 쿠데타를 일으켜 임금이 됐고 아내가 남편의 정치적 동지였다는 점에서도 비슷한데 태종은 왕이 된 후 수많은 후궁을 들이고 원경왕후의 가족을 몰살시켰지만 세조는 여색을 멀리하며 조강지처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지냈다.
하지만 정희왕후는 자식들을 모두 먼저 떠나보낸 불행한 여인이기도 했다. 첫아들 의경세자는 한창때인 20살에 사망했다. 아버지와 달리 성품이 온화하고 공부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일찍 죽지 않았다면 태종 뒤에 세종처럼 또 다른 성군이 나왔을까?
장남이 일찍 죽자 세자에 책봉된 둘째 아들이 세조 뒤를 이어 임금이 됐다. 조선 제8대 왕 예종! 그런데 예종도 즉위 1년여 만에 형과 같은 나이인 20살에 사망하고 만다. 아들 둘을 모두 잃은 후 하나 남은 딸 의숙공주마저 저세상으로 갔다.
하지만 이 모든 불행 속에서도 정희왕후에게는 조선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예종이 후계자 없이 급서 한 후 다음 왕을 지명하는 막중한 역할이었다. 승계 1순위는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 2순위는 죽은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 그리고 차남인 자을산군이 3순위였다. 모두 그녀의 친손자들이다. 그런데 정희왕후는 1, 2 순위를 제치고 3순위 자을산군, 즉 성종을 선택했다. 제안대군이야 4살로 너무 어려 제외했다지만 월산대군 대신 자을산군을 선택한 것은 바로 그의 장인이 당대 최고의 권신인 한명회였기 때문이었다.
성종은 예종이 사망한 당일에 즉위했다. 선왕이 승하한 날 바로 후임왕이 즉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전격적인 일이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논란을 원천 차단하고자 한 조치로 여겨진다. 정희왕후는 예종의 급서로 준비 없이 왕권이 교체되는 비상 상황에서 한명회라는 권신을 방패막이 삼아 왕권의 안정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성종의 나이 14살. 정희왕후는 왕의 할머니 자격으로 조선에서 첫 수렴청정에 들어갔다. 수렴청정은 왕이 어릴 때 즉위하면 대비나 대왕대비 같은 왕실 어른이 왕을 대리해 통치하는 제도다. 정희왕후 때는 어린 왕 뒤에 가림막을 치고 말을 하는 형식이 아니라, 사안별로 왕의 별도 보고를 받고 추인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이 수렴청정 시기가 정희왕후의 진가가 빛난 때였다. 정희왕후는 어린 성종이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 왕권을 안정시킨다는 데 최우선 목표를 뒀다. 일이 잘되면 “이는 주상께서 직접 내리신 결정입니다”라며 공을 왕에게 돌렸고, 일이 잘못되면 “주상은 하지 말자는 것을 이 늙은이가 고집을 부려서 그리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세조의 집권 과정에서 역모 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정적의 후손들에게 기회를 열어주게 하거나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도록 하는 등 남편이 쌓은 업보가 성종에게 미치지 않도록 신경 썼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종을 세자의 아들이 아닌 왕의 아들이 되도록 만들어줬다. 정희왕후가 의경세자를 덕종이라는 시호와 함께 왕으로 추존하고 종묘에 모심으로써 성종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렇게 6년 2개월에 걸친 수렴청정 기간에 오로지 손자의 왕권 안정에 매달린 정희왕후는 성종이 20살이 되자 수렴청정을 끝냈다. 물론 그 이후에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왕실의 어른으로서 소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미련 없이 권력을 내놓은 ‘아름다운 퇴장’이었다. 정희왕후의 이런 역할이 있었기에 성종의 안정적인 25년 치세도 가능했다.
조선에서 수렴청정을 한 왕비는 모두 6명. 첫 사례이자 가장 모범으로 평가받는 사례가 바로 성종 초반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다. 훗날의 수렴청정은 스스로 권력자가 되어 왕권을 약화시킨다든지 친정 가문의 권력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다든지 그 폐단이 적지 않았다.
손자에게 권력을 넘긴 정희왕후는 그 7년 후 세조가 자주 찾던 온양 행궁에서 6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성종은 최상의 예우로 장례를 치르고 남양주 광릉의 세조 곁에 안장했다. 능을 바라볼 때 왼편 언덕에 세조가, 오른편 언덕에 정희왕후가 잠들어 있다.
남자의 나라 조선에서 정희왕후가 남긴 발자취는 500년 세월을 지나 여전히 뚜렷하다. 언니의 혼담이 오가던 날, 만약 정희왕후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