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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원 주미영 Sep 10. 2023

추존왕 원종, 김포 장릉

인조반정에서 왕릉뷰 아파트까지 

     

각종 패악질로 원성이 자자했던 후궁 소생 왕자!

광해군에게 집과 자식을 잃고 술로 지내다 사망했으나

아들이 인조반정으로 왕이 되자 운명이 달라졌으니...  

   



필자가 오늘은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장릉을 찾았다. 사후에 아들 인조에 의해 왕으로 추존된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가 묻혀 있다. 원종의 왕자 시절 이름은 정원군! 선조와 후궁 인빈 김 씨 사이에서 출생했는데 배다른 형 광해군이 그보다 다섯 살 위다.     


선조 재위 시절, 실록에 나타난 그의 행적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선조 35년에 정원군의 하인들이 정원군의 큰아버지인 하원군의 하인들과 시비가 생겨 난동을 부린 일이 있었다. 정원군의 하인들은 하원군의 부인을 납치해 가두어버렸다. 정원군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큰어머니를 내놓지 않고 있다가 새벽녘이 돼서야 풀어줬다. 오늘날 기준으로 봐도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다. 당시 이 패륜 행위가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정원군을 처벌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정원군과 관련한 다른 기록이다.    

 

“.. 여러 왕자들 중 임해군(臨海君)과 정원군(定遠君)이 일으키는 폐단도 한이 없어 남의 농토를 빼앗고 남의 노비를 빼앗았다.”  (선조실록 151, 선조 35611)     


“(순화군이) 비록 임해군(臨海君)이나 정원군(定遠君)의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에 이르렀다...” (선조실록 209, 선조 40318)     


이 말은 순화군보다 정원군이 못된 짓을 더 많이 했다는 얘기다.


실록에 나타난 몇 대목을 통해 그에 대한 평판을 살펴봤는데 이 밖에도 '훈련도감 군사를 빼돌려 노비로 삼았다, 과거시험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특정인을 합격시켰다'는 등의 행적이 기록돼 있다.     


선조의 총애를 믿고 안하무인처럼 살던 정원군은 제15대 왕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180도 달라진 상황에 처하게 된다.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과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이 비명에 간 마당에 잠재적 왕권 위협 인물인 정원군 역시 삐끗하면 위험해질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납작 엎드린 채 오해받을 일을 하지 않고 지냈다. 종친들과 함께 광해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일을 주도하는 등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세 아들 중 똑똑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셋째 능창군이 역모 사건에 휘말렸다. 능창군이 역모 세력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려 한다는 고변이었다. 능창군은 교동도로 유배 갔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원군에게 닥친 불행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광해군은 한 술사로부터 정원군이 살고 있는 집에 왕기가 서려있다고 해서 그의 집을 빼앗아 궁을 짓기 시작했다. 바로 조선 5대 궁궐 중의 하나인 경희궁이다. 당시 이름은 경덕궁이었다. 경희궁은 고종 시절 경복궁 복원에 쓰기 위해 대부분의 전각들이 헐려나갔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궁궐의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었다. 지금은 몇몇 전각만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경희궁 태령전 뒤편으로 가면 샘이 솟은 바위가 있다. 원래 바위 이름이 왕의 바위라는 뜻의 왕암(王巖)이었는데 숙종이 이곳에 서암(瑞巖)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그 이후로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으로도 불리고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에 이어 이미 인경궁이라는 새 궁궐을 짓고 있었는데 또 다른 궁궐이라니... 아무튼 이런 과도한 궁궐 공사는 민심의 동요를 부른 한 요인이 됐다.   

  

선조 때 거리낄 것 없이 잘 나가다가 광해군 시절 자식을 잃고 집까지 잃은 정원군은 술로 시름을 달래며 세월을 보내다 40살에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그에 대한 실록의 기록이다.    

 

“...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지내느라 술을 많이 마셔서 병까지 들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47, 광해 111229)     


여기까지만 보면 불우하게 끝난 한 왕실 종친의 인생 이야기인데... 그가 죽고 4년 후 대반전이 일어났으니... 그의 장남 능양군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 것이다. 인조반정이다.   

  

인조는 즉위 후 아버지를 왕으로 만들려고 시도했. 인조 입장에서는 왕통 계승과 무관한 자신이 무력으로 임금을 끌어내리고 왕이 됐다는 점, 아버지가 왕이나 세자가 아닌 후궁 소생 왕자였다는 점 때문에 정통성이 취약하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면 선조에서 자신까지 자연스럽게 왕위가 이어진 구도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신하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왕실의 종통은 일반 집안과 달리 아버지를 비워두고 할아버지 선조에서 손자 인조로 이어져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더하여.. 차기 왕 예정자인 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경우에는 추존왕의 자격이 있겠지만 후궁 소생 왕자에 불과한 정원군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전례를 보면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됐을 뿐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은 추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조는 집요하게 아버지의 승격을 추진했고 결국 즉위 9년 만에 정원대원군을 원종대왕으로 어머니를 인헌왕후로 추존한 데 이어 12년 만에 종묘에 모심으로써 모든 절차를 마쳤다.


조선에서 자식이 왕이 된 사람에게 붙이는 대원군 칭호를 받은 사람은 모두 4명이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부친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이다. 이 가운데 정원대원군만이 유일하게 왕으로 추존됐으니 죽어서나마 자식 덕을 톡톡히 봤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지위가 달라지니 무덤의 수준도 달라졌다. 정원군은 사망한 후 경기도 남양주시에 일반인의 무덤인 묘에 묻혔으나 대원군으로 승격돼 홍경원으로 바뀌었고 이후 왕이 되면서 정식 왕릉으로 조성됐다.     


김포 장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돌길인 참도가 오르막으로 돼 있고 중간에 계단이 설치된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아들 인조의 무덤이 파주 장릉(長陵)이니 아버지와 아들 능의 한글 이름이 같은 것도 이채롭다. 


그런데 김포 장릉(章陵)은 뜻밖의 사건으로 여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른바 왕릉 뷰 아파트 논란이 일어난 것이다. 장릉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아파트가 올라가자 공사중지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 치열한 소송 전을 거쳐 문화재청이 패소하고 입주가 이뤄졌다.  


조선시대 때는 추존왕 문제로 논란이 일더니 400년이 지난 대한민국에서는 아파트 문제로 떠들썩해졌으니 죽고 나서 자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 또한 팔자라고 해야 할까?     


김포 장릉의 주인은 원종이지만 이곳은 인근 주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 역할을 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왕릉답게 수 킬로미터에 걸쳐 멋지게 산책길이 조성돼 있고 다른 왕릉에서는 보기 힘든 연못도 잘 보존돼 있다.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조선의 그날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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