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 어딘가에 단종도 있고 사람들의 마음도 있다
세조에 의해 머나먼 영월로 유배 온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은 불과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영월 땅에 머문 기간은 이렇게 짧았지만 그가 남긴 자취는 5백 년 세월을 뛰어넘어 이 지역 구석구석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단종이 죽자 강물에 던졌는데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라고 그날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단종은 그를 복귀시키려는 운동에 연루돼, 다시 말해 역모 혐의를 쓰고 죽임을 당했다. 누구도 감히 그 시신을 수습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이때 영월 호장으로 있던 엄흥도가 아들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동을지산(冬乙旨山)에 급하게 매장했다. 이때 땅이 얼어 마땅한 자리를 못 찾고 있었는데 마침 노루가 앉아 있던 곳이 따뜻해서 그곳을 파고 매장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멸문지화를 부를 수도 있는 일을 감행한 엄흥도는 그후 가족과 함께 영월을 떠나 은신했다고 한다.
이름 모를 산 위에 외롭게 누워있기를 80여 년.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기간에 영월 군수로 부임하는 관리들이 이유 없이 사망하는 일이 잇따라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던 중 새로 부임한 박충원이 단종의 매장지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원혼을 달래자 이후에는 급사 사건이 사라졌다.
엄흥도가 시신을 매장한 그 자리에 지금 단종의 장릉이 자리 잡고 있다. 노산군으로 격하됐던 단종 묘에 중종 때 봉분이 조성되고 선조 때 석물들이 세워진 후 마침내 죽은 지 240년이 지나 숙종 때 왕으로 복권되면서 정식 왕릉으로 승격됐다. 추존왕의 예에 따라 능이 조성되면서 석물들이 단출하고 무석인도 없다.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 방치돼 있던 묘를 찾아낸 박충원, 장릉에는 이 두 사람의 충절을 기리는 비각도 세워져 있다.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조선왕릉 중 하나가 실종됐을 것이고 오늘날 42기의 모든 왕릉이 보존된 조선왕릉의 특별한 가치도 훼손됐을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충절을 실천한 분들이기도 하지만 민족 유산을 온전하게 후손들에게 남겨준 고마운 조상이기도 하다.
이 비각은 엄흥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영월 장릉은 한양 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조선왕릉이다. 도성 밖 100리 이내에 왕릉을 조성한 관례가 적용되지 않은 것! 바로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돼 영월에서 유배 중에 사망했다가 훗날 그 자리에 왕릉이 조성되면서 생긴 예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임금이 승하하면 산릉도감이라는 임시 기구가 조직돼 능의 입지부터 토목 공사까지 체계적으로 진행했는데 그와 달리 단종의 시신은 엄흥도에 의해 급하게 매장됐다가 나중에 그대로 왕릉으로 바뀐 경우다. 그러다 보니 정자각 뒤로 언덕과 능침이 질서 있게 배치되지 못하고 정자각의 방향과 능침의 방향이 어긋나는 등 다른 조선왕릉과는 형식이 크게 다르다.
그리고 다른 왕릉에는 없는 특이한 시설들이 있다. 엄흥도와 박충원의 비각 외에도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과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이 있고, 그 옆으로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이 자리하고 있다.
단종이 여느 왕과 달리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다 보니 능에도 충절과 관련된 시설들이 예외적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제향을 지낼 때 쓰기 위한 물을 조달하는 우물인 영천도 있다. 신기한 것은 보통 때는 수량이 적지만 제향을 지내는 한식 때가 되면 물이 많아진다고 한다.
영월에서 단종은 아주 특별한 임금이다. 단종이 영월에서 보낸 기간은 4개월에 불과하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와 조부모를 모두 여의고 혈혈단신이 되어 삼촌에 의해 쫓겨나 이 작은 고을에 와서 죽임을 당했다는 점 때문에 그의 행적 하나하나, 사연 하나하나가 영월 사람들에게 말 못 할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다.
단종이 2개월 정도 머물렀던 청령포에는 700그루의 소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유난히 오래된 나무 하나가 눈에 띈다. 천염기념물로 지정된 ‘관음송’이라는 나무로 단종이 그때는 작았을 이 나뭇가지에 걸터앉아서 시름을 달랬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단종의 시름을 곁에서 보고 들었다는 뜻에서, 볼 관, 들을 음 자를 써서 관음송이라고 나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또한 전망대를 향해 오르다 보면 망향탑이라는 돌탑과 마주치게 되는데 단종이 이곳에 올라 한양을 그리워하면서 하나씩 돌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또한 단종이 머물던 집, 즉 어소에는 특이하게 뻗은 소나무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담장 밖에 있는 소나무가 담장 위를 타고 넘어가 마당 안으로 깊숙이 뻗어있다. 임금을 알아본 소나무가 절을 올리는 형상이라고들 말한다. 영월 곳곳에 흘러넘치는 이런 이야기들에는 그게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단종을 향한 영월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이 녹아 있다.
청령포에는 단종 복권 이후의 상황과 관련된 유적들도 몇 개 남아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금표비다. 금표피는 백성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뜻으로 영조 초기에 세워놓았다. 그리고 어소 마당에도 큼직한 비석이 놓여 있다. 어소가 불탄 후 이곳이 단종이 머물던 집터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영조가 직접 쓴 글씨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단종은 17살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영월에서 해마다 열리는 단종문화제를 통해 기억되고 있고 이 지역의 산과 강 곳곳에 스며들어 토속 신앙의 대상이 됐다.
영월에는 단종이 태백산 산신령이 됐다는 믿음이 있다. 한성부 부윤을 지낸 추익한이라는 선비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유배온 단종에게 산 과일을 진상하면서 위로하곤 했는데 하루는 머루와 다래를 따서 단종을 만나러 가던 중 백마 타고 가는 그와 마주쳤다. 물어보니 태백산으로 간다고 대답하고 홀연히 사라졌는데 추익한이 이상히 여겨 급히 영월로 뛰어가보니 이미 승하한 뒤였다. 이 전설이 기초가 되어 태백산 일대에는 단종을 신으로 모시는 무속 신앙이 퍼져 있고 태백산 중턱에 단종을 추모하는 비각도 세워져 있다.
단종이 숙부 세조에 의해 영월로 유배와 사망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은 사실과 전설 사이 그 어딘가에 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하나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단종은 억울하게 죽었고 그 억울함에 사람들이 가슴 아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 태백산 깊은 산속에 단종이 있고, 사람들의 마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