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 없는 왕의 질주, 그 끝은?
왕의 적장자로 탄탄한 정통성 위에 임금이 된 사람...
하지만 폭력과 기행으로 점철된 공포정치가 이어지고...
마침내 신하들 손에 끌려내려 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니...
필자가 오늘은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의 묘를 찾았다. 폐위된 왕이기 때문에 조나 종이 아닌 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고 무덤 역시 능이나 원이 아니라 일반인의 무덤과 동격인 묘이다. 하지만 폐위된 또 다른 왕 광해군의 묘가 산속에 거의 방치돼 있다시피 한 것과 달리 연산군묘는 나름대로 잘 보존돼 있고 주말에는 문화해설사가 상주하며 방문객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봉분 5기가 있는 이곳에서 연산군과 부인 거창군부인 신 씨는 묘역의 맨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5백 년 이상 그 자리에서 세상의 흥망성쇠를 바라보고 있다.
연산군은 성종이 폐비 윤 씨가 중전이던 때 낳은 장남이다. 태어나고 만 3년이 채 안 된 어린아이 때 향후 그의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어머니가 왕비에서 폐위된 것이다. 남편과의 잇단 불화 끝에 성종은 물론 시어머니 인수대비, 시할머니 정희왕후에게 밉보이면서 윤 씨는 중전이 된 지 3년 만에 궁에서 쫓겨난다. 그런데 왕비 직위에서 물러난 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윤 씨는 사약을 받고 죽게 되는데... 이때 성종이 내린 교지를 보면 어린 원자, 즉 연산군이 성장해 왕이 되면 흉악한 윤 씨가 권세를 휘둘러 조정에 큰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 윤 씨를 죽여야 한다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이런 조치는 훗날 더 큰 화를 부르게 된다.
어머니가 사사됐을 때 연산군의 나이는 7살이었다. 성종은 윤 씨가 폐위되고 죽임 당한 사실을 아들에게 감췄다. 하지만 27살 폐비의 비극적 죽음이 드러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였다. 연산군은 윤 씨가 죽은 지 5개월이 지나 세자에 책봉됐다. 세자 시절 연산군은 공부 성과가 미진해 성종의 걱정을 사기도 했지만 크게 엇나가는 일은 없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특별히 뛰어나지도 크게 모자라지도 않는 평범한 세자였다.
성종이 승하하고 마침내 연산군이 제10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나이 19살이었다. 윤 씨 폐위와 죽음에 관련돼 있는 신하들은 숨죽이며 왕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웠을 것 같다. 실록은 연산군이 즉위 3개월 후에 성종의 묘지문을 보고 비로소 어머니가 폐위돼 죽은 사실을 알고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이듬해에는 윤 씨 묘 상태가 좋지 않다며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하고, 그다음 해에는 윤 씨 사당과 묘에 이름을 지어 올렸다. 즉위 초반에 이렇게 어머니를 기리는 작업을 하면서 반대하는 신하들을 벌주기도 했지만 보복이라고 부를만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연산군의 분노는 왕명에 사사건건 반기를 드는 삼사 대간들, 즉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관리들에게 향했다. 이들은 성종에 대한 제사 문제를 놓고 왕과 충돌했고 우의정 임명을 철회하라고 농성하는가 하면 왕의 사면령을 받들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성종 때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재야의 선비 집단인 사림을 중용했는데 이들은 주로 삼사에 포진해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할 정도로 위세가 강해졌다. 성종은 언로를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대간들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였다. 하지만 연산군은 즉위 초부터 이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뜯어고치겠다는 의지를 반복해서 천명한다.
즉위 4년 후 이른바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뜯어고친 사건이 일어난다. 사림 선비들이 대거 화를 당한 '무오사화'다. 실록청에서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사초를 검토하던 중 조의제문이라는 글이 수록돼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바로 제문의 형식을 빌어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세조의 등극을 부정한 글이었으니 세조 뒤의 왕들까지 그 정통성을 문제 삼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성종 때부터 사림파의 공세에 시달리며 갈등을 빚어오던 훈구파 대신들, 사림 선비들이 ‘위를 능멸하는 풍습’의 장본인이라고 보는 연산군 이 둘은 이심전심으로 조의제문을 옥사로 확대시켰다. 사림의 태두인 김종직은 무덤에서 나와 부관참시되고 살아 있는 김일손, 권경유, 김굉필, 정여창 등은 죽거나 유배됐다. 이 사건으로 왕에게 입바른 소리 하는 분위기는 크게 위축되고 왕의 권력은 강해졌다. 하지만 이 때도 연산군은 우리가 아는 그 엽기적 폭군이 아니었다.
무오사화 이후 불안한 평화가 이어진 지 6년... 마침내 갑자년의 해가 떠올랐다. 연산군 즉위 10년째 해이다. 연산군은 22년 전 폐비 윤 씨에게 사약을 들고 가 형을 집행했던 이세좌에게 사약을 내리고 그의 아들과 동생, 사위를 유배 보냈다. 그리고 그날 밤 아버지 성종의 후궁이던 정 씨와 엄 씨를 궁궐에서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이 두 사람이 폐비 윤 씨를 헐뜯어서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 씨의 두 아들을 끌고 와 어머니를 몽둥이로 치게 했다. 아버지의 후궁이면 연산군에게도 어머니뻘 되는데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잔혹한 행동이었다.
연산군은 이어 칼을 든 채 성종의 두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 즉 자신의 법적인 어머니의 침소로 쳐들어갔다. 정현왕후는 윤 씨가 폐비된 후 새로 중전이 된 사람이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 때 연산군의 부인인 중전 신 씨가 달려와 만류하자 쳐 죽인 후궁의 두 아들을 끌고 이번에는 할머니인 인수대비 처소로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어찌하여 제 어머니를 죽였습니까?”라고 따졌다. 이 일이 있고 한 달 후 인수대비는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은 왕이 아니라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의 모습 그 자체였다.
갑자사화의 신호탄이 된 이 날 밤 사건에 관해 ‘폐비 윤 씨의 어머니가 딸이 죽으면서 입고 있던 피 묻은 적삼을 연산군에게 보냈다.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진실을 알려주자 격분해 일을 벌였다’는 등의 야사가 있다. 연산군이 어느 날 갑자기 사실을 접하고 이성을 잃은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연산군은 이미 즉위 초에 어머니의 일을 알고 묘를 가꾸려고 했고, 폐비 윤 씨의 형제를 특별 승진시키기도 한 것 등으로 봐서 알면서도 오랫동안 복수를 감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그날 밤 참극을 벌인 후 연산군은 곧바로 어머니의 묘를 왕릉으로 바꾸고 제헌왕후로 추존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복수극에 들어갔다. 어머니의 폐비와 죽음에 관련된 인물들을 모조리 찾아내 죽였다. 훈구 대신이든 사림이든 가리지 않은 무차별 학살이었다. 17년 전에 죽은 한명회가 이때 무덤에서 끌려 나와 부관참시됐다.
여기에 더하여 어머니 일과 무관한 사람들에게로 살육을 확대했으니... 평소 고깝게 여기던 인물들이 그 대상이었다. 자신이 기용한 세 정승을 모두 죽였고 세자 시절 스승 조지서, 세종 때부터 임금을 모셔온 내시 김처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이런 잔인한 폭력과 함께 연산군은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절대권력을 구축했다. 임금의 필수 업무이던 경연을 중지하고 사간원, 홍문관은 폐지했으며 사헌부는 기능을 크게 축소했다. 유학의 본산 성균관은 사냥터로 만들었다. 임금이 타는 가마를 신하들이 메야할 정도로 사대부의 위상도 땅에 떨어졌다. 브레이크 없는 왕의 질주였지만 누구도 감히 바른말을 할 수 없었다.
연산군이 바라던 대로 ‘위를 능멸하는 풍습’이 사라진 절대군주의 나라. 그 나라에서 연산군이 몰두한 것은 향락이었다. 각종 대규모 연회에 필요한 음악인과 기생들을 조달하기 위해 채홍사가 전국을 돌며 미녀들을 선발했고 임금의 사랑을 받은 여자는 흥청이 되어 권세를 누렸다. 여기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유래됐다.
연산군을 가지고 놀 정도였다는 장녹수와의 특별한 관계를 비롯해 엽기적 색욕에 대한 기록도 많은데 ‘나들이 가던 중 노상에서 교합했다, 정승의 부인을 불러 간음했다, 모친 기일에 사람들 보는 데서 관계를 가졌다’는 등 하나같이 충격적인 내용이다.
논밭을 사냥터로 만들고 백성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곳곳에 금 표를 설치했는데 경기도 땅의 절반이 금표 안에 들어갔다고 호소하자 충청도였던 평택을 경기도로 배속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이런 듣도보도 못한 임금 노릇을 하던 연산군은 신하들이 일으킨 거사, 즉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고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 갔다가 2개월 후에 사망했다. 임금으로 있은 지 12년, 31살이었다. 폭군으로서 연산군의 이미지는 대부분 갑자사화 이후 폐위 때까지 2년 반 동안의 악행으로 형성된 것이다. 조선에서 연산군 같은 임금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나오지 않았다.
연산군은 처음에는 유배지 교동도에 묻혔다가 부인 신 씨가 중종에게 간청해 당시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 소유였던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신 씨는 연산군보다 31년을 더 살다가 남편 옆에 묻혔다. 연산군 묘역에는 연산군의 딸과 사위, 그리고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가 함께 잠들어 있다.
왕실과 백성들의 축복 속에 태어난 왕의 맏아들, 그는 무엇 때문에 복수를 한 것일까? 지하의 어머니도 자식이 추는 그 광란의 칼춤에 큰 한숨을 내쉬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