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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원 주미영 Sep 02. 2023

이것이 정녕 왕의 무덤인가?
광해군묘  

조선은 왜 광해군을 버렸나?  

살얼음판 같던 16년의 세자 시절을 보낸 임금...

명나라에 대한 명분론에서 벗어나 제3의 길을 바라본 유일한 사람...

그러나 반정으로 폐위돼 역사의 패배자로 남게 됐으니...   

  



광해군을 만나러 가는 길, 뜻밖에 유명 교회의 공원묘원 출입구가 나온다. 안쪽으로 산길을 달려가니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묘가 있다. 평소에는 굳게 잠겨 있다. 필자는 사전에 출입 허가 신청을 했다. 허가가 나면 약속한 시간에 관계 직원이 나와 문을 열어준다.   


경기도 남양주시 외딴 산기슭에 광해군과 부인 문성군부인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폐위돼 신분상 특권이 사라졌다지만.. 한눈에 봐도 과연 15년간 조선의 임금이었던 사람의 무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초라하다. 난간석도 없이 두 기의 봉분이 덩그러니 놓여 있고 석물도 무척 단출해서 다른 왕릉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폐위된 또 다른 임금 연산군묘는 물론 웬만한 사대부가 무덤보다도 더 볼품이 없다. 단순히 입지나 규모뿐 아니라 혼유석 아래 고석도 네 개가 아니라 두 개만 놓고 뒤쪽은 대충 걸쳐놓는 식으로 무덤 조성의 기본 예법조차 지키지 않고 있다. 필자 같은 비전문가가 봐도 광해군을 죽어서도 비하하려는 인조와 반정 세력의 의도가 엿보인다.     


조선왕 중 폐위돼 왕자의 호칭인 으로 강등된 사람이 3명 있었는데 그중 노산군으로 떨어진 단종은 훗날 복권돼 다시 왕의 지위를 되찾았지만 광해군과 연산군은 폐위된 임금 상태로 남아 있다. 그래서 무덤에도 '릉'이 아니라 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참고로 왕과 왕비의 무덤은 릉(陵), 왕의 부모나 세자 세손의 무덤은 원(園)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묘(墓)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 씨 소생이다. 정비 의인왕후가 자식이 없어서 후궁 아들들이 세자 후보였는데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은 성격과 행동이 거칠어 처음부터 탈락했다. 태도가 반듯하고 능력이 우수한 광해군이 유력 세자 후보로 주목받았는데 광해군이 3살 때 친모가 사망하자 또 다른 후궁 인빈 김 씨의 아들인 신성군이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해놓는 것이 왕실 안정의 기본이었지만 선조는 즉위 후 25년간이나 세자를 책봉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정해 종사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청이 제기됐고 선조는 피란길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때 광해군의 나이 18살! 선조가 총애하는 신성군이 아직 어렸기 때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왜군을 피해 개성으로, 평양으로, 의주로 도망가기 바쁜 선조를 대신해 광해군은 전시 임시정부 성격의 분조를 이끌고 전국을 돌며 흩어진 대신들을 모으고 의병을 규합해 왜적에 맞섰다. 이러다 보니 왕의 인기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세자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다. 이 때문이었을까? 임진왜란을 거치며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태도는 눈에 띄게 적대적으로 변했다. 자식이자 세자이기 전에 정적으로 여긴 것이다. 여기에 명나라가 광해군에 대한 세자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인왕후가 죽고 새로 들인 인목왕후가 적통 아들 영창대군을 낳자 광해군의 입지는 더욱 흔들렸다.       


조정의 힘이 급속하게 영창대군에게 쏠리던 어느 날, 선조가 찹쌀떡을 먹고 갑자기 위독해지더니 숨을 거두고 광해군은 말 그대로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의 나이 34살. 16년의 세자 생활 중 임진왜란을 비롯한 국가적 대소사를 경험한 원숙한 왕의 등장이었다.  


광해군을 특징짓는 두드러진 정책이 외교 정책이다. 명나라가 기울고 여진족의 후금이 떠오르던 상황에서 후금의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명나라는 다급하게 조선에 지원병을 요청했다.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를 국시처럼 떠받들던 조선에서 광해군은 다른 판단을 했다. 대규모 군사를 보낸다 한들 후금과 맞서 승산이 없고, 후금과 적대관계가 굳어질 경우 조선의 존립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군사 파병에 소극적으로 임했는데 신하들은 나라가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의리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며 왕을 압박했다. 그간 이이첨 등 대북 세력은 광해군의 지지 기반이었는데 이들 역시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다른 신하들과 다르지 않았다. 죽고 죽이는 살육의 정쟁을 해오던 사대부들이 명나라를 받들어야 한다는 점에는 대동단결했다. 유일하게 임금 혼자 등거리 외교를 주장하는 상황. 결국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을 총사령관으로 만 3천 명을 파병한다.


광해군은 그에게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데 힘쓰라”라고 지시했다. 목숨을 다해 명나라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신하들의 인식과는 매우 다르다. 조명(朝明) 연합군은 심하에서 후금군을 만나 크게 패했다. 명나라군은 궤멸당했고 조선군도 3개 부대 중 2개 부대가 패했다. 전군이 전멸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강홍립은 사람을 후금 진영에 보내 조선은 후금을 적대할 뜻이 없는데 어쩔 수 없이 출병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교섭 후에 투항했다.      


투항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조정은 강홍립과 투항한 군사들의 가족을 잡아 처벌해야 한다고 나섰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여차하면 투항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광해군은 중국의 판도가 바뀌는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명분론이 아닌 조선의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판단하고 행동한 사실상 유일한 인물이었다. 명나라는 달래고 후금은 자극하지 않는다는 그의 외교 노선은 인조반정과 함께 친명 정책으로 급선회했고 머지않아 병자호란을 불러오게 된다.     


조선 역사에서 손꼽히는 민생 개혁을 광해군 때 시작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로 대동법이다. 지역 특산물을 재산 정도와 관계없이 모든 백성들에게 내도록 한 공납 제도는, 중간 대납업자들과 관리들이 결탁해 백성들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변질됐다. 이것을 토지 소유 정도에 따라 쌀로 징수한 후 이 쌀로 특산물을 구입해 조달하는 방식으로 바꿈으로써, 민초들의 부담을 크게 줄였다. 광해군 때 경기도를 대상으로 실시된 대동법은 이후 점차 전국으로 확대됐다.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일은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됐다. 영창대군은 잠재적 왕권 도전자라는 점에서 그를 제거한 것은 조선 왕실에서 있어왔던 권력 투쟁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인목왕후를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유폐한 것은 훨씬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인목왕후는 광해군의 법적인 어머니라는 점에서 조선 윤리의 근간인 효를 정면으로 부정한 사건이었다.     


또한 광해군이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을 중건한 것은 임진왜란 후 복구 사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지만 지금의 경희궁에 해당하는 경덕궁과 사라진 인경궁 등 새 궁궐 건설에 집착한 점도 정도를 지나쳤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실정들이 반정의 명분이 될 수 있을까? 반정의 구실이나 빌미가 될 수는 있겠지만 왕조 국가에서 왕을 쫓아내는 명분치고는 억지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명나라를 배반했다는 반정 명분이야말로 성리학 교조주의에 빠져 세상 돌아가는 걸 몰랐다는 당시 사대부들의 자기 고백 아닐까?     


광해군은 세월이 흘러 극적으로 재평가된 조선왕으로 꼽힌다. 실정과 패륜으로 쫓겨난 왕에서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은 탁월한 지도자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국익이 명분보다 우선이라는 신념을 혼자만 붙들고 있어야 했으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광해군은 15년 동안 왕위에 있었고 그보다 긴 18년을 유배지에서 살다가 떠났다. 죽기 4년 전 마지막 유배지 제주도에서 그는 조선이 병자호란으로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명분론이 사망한 결정적 사건이었지만 그 후로도 조선은 광해군에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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