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남편의 자리가 비어있는 비운의 여인
33년간 중전 자리를 지킨 조선 최장수 왕비...
하지만 남편 영조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다 생을 마치고...
세월이 흐르고 흘렀지만 남편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는데...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에 있는 홍릉을 찾았다.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가 묻혀있는 곳으로 서오릉에 있는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의 유명세에 치어 별로 주목받지 못한다. 하지만 정성왕후의 생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정성왕후는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신부 13살, 신랑은 11살 때였다. 17년이 지나 남편이 왕세제가 되면서 왕세제빈이 됐고, 그 3년 후 연잉군이 왕이 되면서 왕비로 책봉됐다. 그리고 33년간 조선의 최장수 왕비를 지내고 66살에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만 보면 참으로 행복한 여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 반대였다. 평생 남편인 영조에게 외면받아 쓸쓸한 삶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영조가 정성왕후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왕비가 생일을 맞으면 신하들이 하례를 드리는 것이 관례였는데 정성왕후의 55번째 생일 때 영조는 생신 하례를 그만두라고 명한다. 왕비의 생일과 중종비 단경왕후의 기일이 겹친다는 이유였는데 신하들은 그런 이유로 하례를 안 한 적이 없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영조가 듣지 않았다. 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그다음 해에도 같은 이유로 중전의 탄신 하례를 못하게 했다. 몇 년 후 정성왕후가 회갑을 맞게 됐다. 조선시대에는 살아서 60살이 된다는 게 큰 경사였다. 그래서 민가에서도 성대하게 잔치를 여는 것이 당연한 풍습이었는데 영조는 아내의 회갑 때 하례 드리는 것도 못하게 했다.
“... 우의정 김상로가 중궁전의 회갑에 하례를 드릴 것을 극력 청하였는데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자에게 가서 전하도록 하였다... 박사눌이 말하길 “... 동궁이 이 하교를 받고 매우 실망하여...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습니다.”(영조실록, 영조 28년 11월 23일)
이 기록은 동궁, 즉 사도세자가 생모는 아니지만 정성왕후를 어머니처럼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그만큼 좋았다는 얘기다. 정성왕후는 갈등이 심한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성왕후는 영조와의 사이에 후사 없이 66살에 창덕궁 대조전 관리합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성왕후가 죽던 날 실록은 영조의 충격적 태도를 기록하고 있다.
'중전이 승하한 지 몇 시간이 지나 딸 화완옹주의 남편이 사망했다는 부음이 들어왔다. 그러자 영조는 왕비의 곁을 지키는 대신에 사위의 빈소로 떠나려고 했다. 이때 왕의 비서인 승지 이최중이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이렇게 망극한 시기를 당하여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망극한 일을 하시려 합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이최중의 직임을 체차(박탈)하였다. 이어 대사간 이득종이 말하기를 “신의 관직을 체임하더라도 전하의 이번 행차는 결단코 할 수 없습니다."하자 그의 직임을 체차(박탈)하였다.'
이런 영조의 행동은 어떤 잣대로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비록 왕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해도 왕비는 그냥 아내가 아니고 한 나라의 국모였는데 죽은 당일에 중전의 빈소 대신에 사위한테 가겠다는 것은 지극히 비상식적이었다. 이 때문에 신하들이 직을 걸고 만류했지만 영조는 신하들을 해임시키면서까지 기필코 사위 빈소를 찾아갔다. 이런 사람을 왕으로 모시고 33년을 왕비로 살았고 남편으로 받들며 53년을 아내로 살았으니. 정성왕후의 삶이 얼마나 처량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서일까?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성왕후의 며느리가 되는 혜경궁 홍 씨는 한중록에서, '정성왕후가 숨을 거두기 전 검은 피를 한 요강 토했다, 시어머니가 가슴속에 쌓인 울분을 다 쏟아내고 돌아가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영조는 왜 그토록 정성왕후를 미워했을까? 영조 스스로 그 이유를 말한 적이 없으니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전해오는 일화에 의하면 혼례를 올린 첫날밤에 영조가 신부에게 손이 왜 이렇게 곱냐? 고 물었더니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고생을 안 해서 그렇다'고 답한 것이 화근이 됐다고 한다.
어머니가 천한 무수리 출신이어서 자격지심을 갖고 있던 영조에게 신부의 그 말이 콤플렉스를 자극해서 그 순간부터 남남이 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영조 자신이 못마땅해하는 사도세자를 정성왕후가 감싸줬기 때문에 미워하게 됐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영조의 성격적 결함이 그 바탕이 됐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영조는 사람을 편애하고 한번 찍히면 끝까지 미워하며 충동적이고 괴팍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나라는 잘 다스렸을지 몰라도 그런 성격을 직접 겪어야 했던 가족들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것 같다.
정성왕후가 죽고 홍릉을 조성하면서 영조는 아내의 봉분 옆에 땅을 비워놓았다. 자신이 죽으면 매장될 땅이었다. 19년 후 영조가 숨졌다. 재위기간 52년으로 최장수 임금을 지냈다. 그런데 그때 비워둔 자리가 지금까지 그대로다. 비석에도 영조대왕 글자가 빠져있다.
영조는 어디로 갔을까?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지 않았다. 할머니 정성왕후가 있는 고양시와 정 반대쪽에 있는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 원릉에 모셨다.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와 함께. 그런데 영조가 매장된 원릉은 원래 17대 왕 효종의 능이 있던 자리로 병풍석 틈이 갈라지는 등 문제가 생겨서 효종 능이 옮겨가고 100년 넘게 비어 있던 땅이다. 혹자는, 살아서도 혼자, 죽어서도 혼자이니 더 불쌍하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문득 정성왕후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왕비님, 곁에 남편이 없어서 쓸쓸하신가요? 아님 죽어서라도 남편에게서 벗어나니 좋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