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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원 주미영 Jun 15. 2023

7일의 왕비, 단경왕후 온릉

중종은 왜 임금이 되자마자 왕비를 버렸을까? 

하룻밤 사이에 천하가 뒤바뀌며 왕이 된 남편

그러나 왕비는 단 7일 만에 궁궐에서 쫓겨나고

여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간 한 여인이 잠들어 있으니...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 신 씨가 묻혀 있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의 온릉을 찾았다서울 강남구 정릉에 있는 남편 중종과 이렇게 멀리 떨어져 묻힌 까닭은 무엇일까? 


단경왕후 신 씨는 13살에 한 살 어린 훗날의 중종진성대군과 혼인했다진성대군의 아버지가 성종어머니는 정현왕후였으니 임금의 적자에게 시집갈 정도로 좋은 집안 출신이었다진성대군 위로 이복형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연산군이다단경왕후의 아버지는 신수근이라는 사람으로 그의 여동생은 연산군의 왕비로 들어갔고 딸은 진성대군에게 시집갔다당시의 신 씨 가문은 이렇게 왕실과 깊숙이 연결돼 있었다. 


단경왕후의 비극은 중종반정에서 시작됐다박원종유순정성회안 등이 군사를 일으켜 폭정을 자행하던 연산군을 왕위에서 끌어내렸다그리고 진성대군을 새 임금으로 옹립했다조선 제11대 왕 중종이다정실 왕비가 낳은 아들이 연산군과 진성대군 두 명뿐이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그런데 정변 과정에서 중종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군사들이 자신의 집에 몰려왔을 때도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훗날의 인조반정에서 인조 자신이 거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스스로 임금 자리에 오른 점과 비교하면중종은 말 그대로 얼떨결에 임금이 됐다.     


야사에서는 중종반정 그날 밤 일을 이렇게 전한다


'군사들이 몰려오자 중종은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러 온다고 생각하고 자살하려고 했다. 진성대군에게 12살 위 이복형인 연산군은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납작 엎드려 지내고 있는 중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이때 부인 신 씨가 말하기를군사들의 말머리가 집을 향하고 있으면 죽이러 온 것이고집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으면 모시러 온 것일 테니 확인해 보자고 했고살펴보니 과연 말머리가 집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신 씨가 그만큼 지혜로웠다는 얘기다.


단경왕후 신 씨는 중종에게 생명의 은인인데 중종이 즉위하자마자 반정 주역들이 단경왕후 신 씨를 폐위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이때 중종은 19단경왕후는 20살이었다12살과 13살 어릴 때 만나 이제 남녀의 정을 알 만한 나이가 됐고 금슬도 더없이 좋았중종은 조강지처를 어찌 버리냐며 반대했지만 신하들의 손에 의해 하루아침에 임금이 된 중종에게는 이들의 요구를 거부할 힘이 없었다.  

2017. KBS '7일의 왕비'에서 중종과 단경왕후


그렇다면 반정 주역들은 왜 단경왕후 신 씨를 몰아내려고 했을까바로 정변을 일으키던 날 단경왕후의 부친 신수근과 신 씨 형제 등을 자신들이 죽였기 때문이다신수근의 여동생이 연산군의 왕비였으니 신수근은 연산군과 처남 매부 사이였다정치적으로도 신수근은 연산군의 핵심 측근이었다다시 말해 반정 세력에게 신수근은 제거 대상 1순위였다. 자신들이 제거한 사람의 딸이 중전 자리에 계속 머문다면 언젠가 보복을 당할 수 있기에 후환을 없애려 한 것이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반정 세력은 거사 직전에 신수근에게도 참여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박원종 등이 신수근을 찾아가 누이와 딸 중 누가 중하냐고 물었다여동생의 남편인 연산군딸의 남편인 진성대군 중 누구를 선택하겠냐는 물음이었는데 신수근은 임금이 비록 포악하나 총명한 세자를 믿겠다며 거사 참여를 거부했고  이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신하들의 거듭된 압박에 중종은 결국 단경왕후를 폐위시켰다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물러났는데 조선의 왕비 중 최단명이었다남편은 임금이 됐지만 신 씨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남편에게서 버림받는 기가 막힌 일이 불과 일주일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단경왕후는 경복궁 옆 인왕산 기슭에 거처를 두었어쩔 수 없이 아내를 버려야 했던 중종은 인왕산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이 사실을 안 단경왕후가 인왕산 바위 위에 자신의 다홍치마를 펼쳐놓고 애틋한 정을 표현했다고 한다이런 사연으로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이 생겨났다.     

궁에서 쫓겨나는 단경왕후 신 씨

단경왕후는 20살에 궁을 나와 장장 51년을 혼자 살다가 71세에 세상을 떠났다친정 집안인 거창 신 씨 묘역에 안장됐다가 180여 년이 지나 영조 임금 때 왕비로 복권되면서 지금의 온릉에 묻혔다온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생략되는 등 추존 왕비의 능제에 따라 단출하게 조성돼 있다군사시설보호구역 안에 있어서 오랫동안 비공개 상태에 있다가 2019년 11월부터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중종과 단경왕후의 애틋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야사로 전해지고 있다실록에도 일부 관련된 내용이 있다.  

   

폐비 신 씨 집 수직 군사를 단지 4명만 정했는데매우 부족하여 근일 도둑이 출입한 일이 있었다6명으로 늘려 지키도록 하라.” (중종실록 중종 23 1528년 1월 29)     


20년이 넘어서도 중종이 신 씨에게 관심을 썼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종이 죽기 직전에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궁궐로 들어온 일이 있었는데중종이 폐비 신 씨를 보고 싶어 해 들어오게 했다는 소문도 실록에 실려 있다실제로는 여승들이 들어왔다고 사관이 밝히고 있지만 소문은 그렇게 났다. (중종실록 105중종 39년 11월 15     


하지만 중종과 단경왕후의 애틋한 이야기는 대부분 야사나 전설로 전해지고 차분하게 보면 중종은 신 씨를 내보낸 후 여러 부인을 두고 많은 자손을 낳으며 여느 왕과 다름없이 지냈다신 씨를 제외하고 왕비 두 명, 후궁9명을 뒀는데 이들에게서 모두 아들 딸 스무 명을 낳았다중종 재위 중에 신 씨를 다시 왕비로 복위시키자는 주장도 몇 차례 제기됐지만 중종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종은 단경왕후까지 정식 왕비가 3명이었음에도 죽어서는 왕과 왕비들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중종은 서울 강남구 정릉에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는 경기도 양주 온릉에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는 경기도 고양 서삼릉 內 희릉에. 그리고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는 서울 태릉에 묻혀 있다     


혹시 첫 인연을 잘 못 꿰어 이렇게 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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