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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원 주미영 Apr 15. 2023

 조선의 첫 왕비 신덕왕후, 정릉

오랜시간 잊혀졌다 복권된  왕비의 눈물

이성계에게는 부인 두 명이 있었다. 첫째 부인 한 씨는 이성계와 같은 고향인 동북면, 지금의 함경도 출신이다. 15살에 이성계와 혼인해 6남 2녀를 낳았다. 아들 여섯 중 제2대 왕 정종, 3대 왕 태종이 한 씨 소생이다. 남편과 두 아들까지 가족에서 임금이 세 명이나 나왔으니 한 씨는 사후에 신의왕후로 추존됐다.   


이성계는 젊은 날부터 북방 홍건적과 남방 왜구들을 몰아내느라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다. 장수의 아내로서, 한 씨는 고향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 대소사를 돌봤다. 전형적인 조강지처인 셈이다. 그런데 이성계가 전공을 쌓아 고려의 중앙 정치 무대인 개경에 진출한 후 20살이나 어린 부인을 새로 맞아들였으니 그녀가 바로 정릉의 주인인 신덕왕후 강 씨다.      


신덕왕후의 집안은 고려에서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였다. 이성계는 변방의 장수에서 권력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오르던 인물! 그래서 두 사람의 혼인은 신, 구 권력이 결합한 정략결혼의 성격을 띠었다. 실제로 신덕왕후의 집안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 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덕왕후는 이성계와의 사이에서 방번, 방석, 그리고 경순공주를 낳았다. 조선 건국 당시 이 아이들은 10살 정도에 불과했지만 첫째 부인 신의왕후가 낳은 아들들은 모두 2~30대로 장성한 상태였다. 그런데 첫째 부인 한 씨(1337.10.6~1391.11.25)가 조선 건국 8개월 전에 사망했다. 자연스럽게 둘째 부인 신덕왕후가 조선의 첫 왕비가 되었다. 신덕왕후는 조선 개국 직후 이방원 같은 기세등등한 전처소생 자식들을 제치고 자신이 낳은 아들 방 석을 왕세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이방원이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하지 않았을까? 


하여튼 신덕왕후는 4년 후 마흔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뒤이어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두 아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딸은 출가해 스님이 됐다.     

신덕왕후 강씨와 왕세자 방 석  (드라마 <태종 이방원> 2021~2022 KBS1)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는 경복궁 가까이 있는 지금의 중구 정동에 능을 마련했다. 바로 정릉! 정동이라는 지명도 이 정릉에서 유래했다. 능 옆에 흥천사라는 사찰도 지어 지성으로 제를 올리게 했다. 태조는 절의 종소리를 들은 후에야 밥을 먹고 잠에 들 정도로 부인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조선의 첫 왕비 신덕왕후의 능, 즉 정릉의 시련은 이방원이 왕이 된 후 본격화됐다. 능이 너무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다며 능에서 백 걸음 떨어진 곳에서는 개인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했다. 이어 아버지 태조가 죽자 능을 아예 도성 밖으로 옮기도록 했는데 그곳이 북한산 자락에 있는 지금의 정릉이다. 능에 있던 석물들은 뜯어서 다리 보수에 쓰도록 했다.  바로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종로구의 광통교다. 

청계천 광통교 

 

광통교 아래 병풍석들

교각 아래편으로 예사롭지 않은 문양의 육중한 돌들이 눈에 띈다. 신덕왕후 정릉에서 봉분을 둘러싸고 있던 병풍석들이다. 덕분에 광통교는 왕비의 능을 장식한 돌들로 가득한 특이한 다리가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태종은 종묘에 자신의 친 어머니인 신의왕후 신주만 모시고 신덕왕후는 제외시켰다. 다시 말해 후궁의 지위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왕 중에서도 권력이 막강했던 태종이 이렇게 신덕왕후를 미워했으니 그녀의 능이 온전할 리가 있을까. 정릉은 사실상 평민의 묘처럼 버려지다시피 했다고 한다. 능도 버려지고 종묘에서 쫓겨나고 조선의 첫 왕비 신덕왕후는 이렇게 오랜 세월 잊힌 존재였다.          


그러다 260년이 지난 1699년, 제18대 현종대에 이르러 정릉이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왕릉으로서 위상도 갖추게 되었다. 이때 신덕왕후는 종묘에도 모셔지면서 비로소 복권됐다. 종묘에 배향되던 날 정릉 일대에 비가 많이 내렸는데 신덕왕후가 맺힌 한을 푸느라 그렇게 눈물이 빗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성북구 정릉 정자각 

한 맺힌 왕비의 사연을 생각하며 정릉 숲길을 걸어보았다. 왕릉 자체의 구역은 그리 넓지 않지만 그보다 훨씬 넓고 깊은 숲이 능을 둘러싸고 있다. 숲 사이로 산책길이 쾌적하게 잘 조성돼 있어 자연스럽게 사색의 시간을 갖게 된다.      


정릉을 나오면 흥천사라는 안내판을 볼 수 있다. 따라가 보니 옛 정릉 옆에 있던 흥천사가 옮겨와 자리 잡고 있다. 태조가 죽은 왕비를 위해 지은 절로 오랜 세월 그 위치를 유지하다 연산군 때 화재로 전소된 후 정조 때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이후 증축을 거듭해서 지금은 꽤 큰 규모가 되었다. 

    

흥천사


왕비는 이제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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