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동쪽 끝에 있는 태릉! 50년 세월 태능선수촌으로 더 잘 알려진 바로 그 태릉이다. 이곳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녔던 여인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그 여인은 바로 대신들은 물론이고 임금도 손아귀에 넣고 20년간 권력을 휘두른 문정왕후 윤 씨(1501~1565)다.
왕비 혼자 모셔진 단릉임에도 거대한 석상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다.
무인석과 함께 한 주피디: 500여년 조선 역사 중 이즈음 석물들 크기가 가장 크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세 번째 왕비다. 중종의 첫 번째 비 단경왕후는 중종반정 직후 폐위됐고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는 훗날 인종이 되는 아들을 낳자마자 사망했다. 그래서 세 번째 왕비를 간택했는데 바로 문정왕후 윤 씨(1517년 책봉)다. 장경왕후 소생 원자는 불과 여섯 살에 세자에 책봉됐다. 중종 이후의 후계 구도가 일찌감치 확정된 것이다. 문정왕후는 중종과의 사이에서 내리 딸만 넷을 낳았다. 설령 아들을 낳았다 하더라도 이미 세자가 있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친아들을 보위에 올리는 게 여의치 않았을 텐데 아들도 낳지 못했으니 문정왕후가 아무리 야심이 크다 한들 뜻을 이루는 게 쉽지는 않은 분위기였다.
당시의 후계 구도와 관련해 궁궐에서는 이례적인 사건이 잇따랐다.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 경빈 박 씨가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2천 년대 초 ‘여인천하’라는 TV드라마에서 탤런트 도지원 씨가 경빈 역을 맡아 앙칼진 목소리로 시도 때도 없이 ‘메야~’라고 소리치던 장면 기억하는 분들 많을 것 같다. 경빈 박 씨에게는 복성 군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새로 들어온 왕비 문정왕후도 아들이 없으니 세자만 없어진다면 복성군이 보위를 이을 수도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유명한 ‘작서의 변’ 사건이 일어난다. 주술의 힘으로 세자를 해치기 위해 세자의 생일에 불에 탄 쥐를 동궁에 매달아 놓은 것이다. 이 일로 경빈 박 씨가 범인으로 지목돼서 복성군과 함께 궁에서 쫓겨났다. 6년 후에는 다시 세자를 저주하는 인형이 동궁 근처에서 발견됐다. 이 사건 역시 경빈 박 씨의 소행으로 조사되면서 경빈과 복성군이 사사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경빈과 복성군이 후계 구도에서 사라지고 1년이 지난 어느 날, 마침내 문정왕후가 아들을 낳았다. 왕비가 된 지 17년 만의 일이다. 하지만 이때 세자의 나이가 이미 19살이었으니 갓난아기가 이 장성한 후계자를 대체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아들이 태어나자 문정왕후 윤 씨는 자신의 남동생들을 중심으로 정치 세력화를 본격화했으니 이들은 소윤이라고 불렸다. 세자의 생모 장경왕후 윤 씨 집안사람들이 이미 세자 보위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대윤이라고 불렸다. 두 세력 간의 갈등은 중종 말기로 갈수록 격화됐다. 반정으로 얼떨결에 임금이 된 중종이 38년이라는 긴 세월 임금의 자리에 있다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세자가 그 뒤를 이었다. 조선의 제12대 왕 인종이다.
힘의 균형은 친 인종 세력, 즉 대윤에게 쏠렸다. 소윤 세력의 위기였지만 문정왕후는 강한 카리스마와 정치력으로 소윤의 붕괴를 막아냈다. 천성이 따뜻했던 인종도 세자 시절처럼 문정왕후에게 효도하고 배다른 동생 경원대군을 우애로 대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종은 즉위한 지 불과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만다. 더욱이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인종은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에게 보위를 넘긴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조선 제13대 왕 명종이 즉위했으니 그의 나이 불과 12살! 마침내 문정왕후의 시대가 열린 순간이다. 왕비로 간택돼 궁에 들어온 지 28년, 온갖 사건과 우연과 욕망이 엇갈린 질곡의 세월을 지나 조선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 권력자가 등장한 것이다.
문정왕후는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해 통치하는 수렴청정에 들어갔다. 문정왕후가 쥔 권력의 칼끝은 전임 임금인 인종의 보위 세력이었던 대윤에게로 향했다. 명종 즉위 직후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최측근인 윤원형이 주도해 대윤의 핵심 인물인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주요 인물들을 귀양 보낸 후 죽였다. 을사사화다. 이후에도 문정왕후 세력은 약 6년에 걸쳐 대윤의 씨를 말렸고 대윤에 우호적인 선비들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문정왕후는 조선의 이념에 맞지 않게 불교 중흥책을 폈다. 스님이 될 수 있는 공인 제도인 도첩제와 불교 지도자를 뽑는 승과를 부활시켰고 불교의 중심 종파인 선종과 교종을 복원시켰다. 이때 핵심적 역할을 한 사찰이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다. 봉은사 주지 보우 스님이 문정왕후의 후원 아래 불교 진흥에 앞장섰다.
조선의 이념인 성리학에 반하는 정책이어서 조정 안팎의 반대가 거셌지만 문정왕후는 꿈쩍도 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문정왕후는 명종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8년간은 전적으로 권력을 휘둘렀고 수렴청정을 끝낸 다음에도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임금이 힘이 없었으니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 등 윤 씨 일가의 전횡과 부패가 극에 달했다. 문정왕후와 소윤 집단의 국정 농단이 지속될수록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임꺽정 같은 의적이 민초들에게 희망을 주던 시절이었다. 문정왕후는 이렇게 20년간 권력을 휘두르다가 64세에 세상을 떠났다. 2년 후에는 아들 명종도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태릉(문정왕후 단릉)
문정왕후의 태릉에서 약 1.5킬로미터 거리에 아들 명종의 능, 강릉이 있다. 두 능을 잇는 숲길이 조성돼 있지만 일부 시기만 개방하고 있다. 강릉에는 명종과 인순왕후가 잠들어 있다. 명종(1534~1567, 재위 1545~1567)은 짧지 않은 22년간 보위에 있었지만 어머니와 윤원형의 위세에 눌려 임금다운 임금 노릇도 못해보고 떠났다.
문정왕후가 명종을 여염집 아들처럼 회초리로 때렸다는 얘기가 야사에 전해져 올 정도로 존재감 없이 세월을 보낸 것이다. 생전에 이렇게 드센 어머니 밑에서 기죽어 살던 명종이 죽어서도 어머니 옆에 묻혀 있으니 어머니와 아들은 저 세상에서 무슨 말을 주고받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