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의 핵으로 떠오른 경종은 그날 밤 어떻게 쓰러졌나?
14살에 어머니 희빈장 씨의 비극적 죽음을 목격한 세자!
천신만고 끝에 왕이 되었으나 그 또한 4년 만에 갑자기 사망하고...
300년을 이어온 경종 독살설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는데...
필자는 5월 13일 서울 북동쪽에 있는 성북구 화랑로의 의릉을 찾았다. 조선 제20대 왕 경종과 선의왕후가 묻혀 있는 곳이다. 천장산 자락에 자리 잡은 의릉은 여느 왕릉보다 유난히 훼손이 심했다. 1962년 중앙정보부가 이 자리에 설립되면서 곳곳에 건물을 짓고 연못을 파 원형을 크게 바꿔놓았다. 이후 30여 년이 지나 국정원이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지금은 기본적인 복원이 이뤄진 상태다.
경종은 아버지 숙종이 희빈 장 씨에게서 얻은 첫아들이다. 후사가 없던 숙종은 얼마나 기뻤던지 100일도 안 된 후궁 소생 갓난아기를 원자로 책봉했다. 이때 정비인 인현왕후 나이는 스물셋에 불과했다. 왕비가 충분히 후사를 볼 수 있는 나이인데 성급하게 후계자를 정했다며 인현왕후를 지지하는 당시 집권 세력 서인이 극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숙종이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자를 종묘사직에 고해 절차를 마쳤는데 보름 후,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항명으로 받아들인 숙종은 송시열과 서인의 주요 지도자들을 죽였고, 서인은 몰락하게 된다.
경종은 후세에는 존재감이 별로 없는 왕이지만 태어나자마자 정국에 파란을 불러일으킨 태풍의 핵이었다.
이렇게 서인을 축출한 숙종은 인현왕후 폐출, 희빈장 씨 중전 확정, 세자 책봉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이때 세자 나이가 채 두 돌도 되지 않았을 때이니, 경종은 아기 때부터 초고속으로 제왕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숙종이 무수리 출신 숙빈 최 씨에게서 훗날의 영조가 되는 연잉군을 낳으면서 급변하게 된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다시 중전으로 들이고 장 씨를 후궁으로 강등시켰는데 후에 인현왕후가 병사하자 인현왕후와 한편이던 숙빈 최 씨가 희빈 장 씨의 저주 때문에 인현왕후가 죽었다고 고변했다. 이에 숙종은 희빈 장 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인다. 즉 경종에게 숙빈 최 씨는 친모를 죽게 한 원수인 셈이다.
아버지의 분노로 어머니가 죽임을 당하고 숙빈 최 씨가 낳은 배다른 동생 연잉군은 경쟁자로 커가는 상황.
한때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세자는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때 정치구도를 살펴보면, 이미 인현왕후의 중전 복원과 함께 재집권한 서인 세력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강경파인 노론이 숙빈 최 씨 소생 연잉군을 밀고 있었고 온건파인 소론이 희빈 장 씨 소생 세자를 지지하고 있었으나 그 세력은 노론이 훨씬 강했다. 희빈 장 씨 퇴출과 사사를 강력히 주장해 온 노론 입장에서는 만일 장 씨 소생 세자가 그대로 왕위를 잇는다면 연산군 시절의 참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노론은 숙종을 움직여 세자를 낙마시키기 위해 여러 계책을 구사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세자로 하여금 숙종을 대신해 업무를 보도록 하는 대리청정이었다. 숙종이 노론의 영수 이이명을 은밀히 만난 후 대리청정을 지시했는데 소론에서는 대리청정을 하다 세자의 실책이 나오면 이를 빌미로 세자를 폐위시키려는 음모라고 강력히 반발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렇게,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위태로운 날들을 보내던 중 숙종이 59세로 승하하면서 세자가 천신만고 끝에 왕위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조선 제20대 왕 경종이다.
하지만 임금으로서 경종의 위상은 취약했다. 먼저 노론 세력이 여전히 조정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여기에 32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자식이 없어 승계 구도가 불확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론이 선제공격을 하고 나섰으니 바로 연잉군으로 후계자를 지명해 버린 것이었다. 노론은 소론 대신들을 따돌린 채 한밤중에 경종을 압박해 윤허를 얻어낸 후 대비 인원왕후의 교지까지 받아냄으로써 연잉군을 세제로 옹립했다.
후계자 지명이라는 왕조 국가의 최대 사안을 한밤중에 들이닥친 신하들의 압박에 내몰려 그들이 원하는 사람으로 결정해야 할 만큼 경종은 무기력했다. 후계자 지명으로 경종을 반 허수아비로 만든 노론은 아예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기 위해 이번에는 대리청정을 들고 나왔다. 연잉군으로 하여금 국왕 업무를 대신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33살 임금에, 27살 세제의 대리청정’. 이것은 대놓고 왕 대신 세제를 왕으로 삼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대리청정을 윤허했다 되돌리기를 몇 차례 느닷없이 경종은 노론 신하들을 소론 신하들로 대거 교체하는 인사를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노론의 입과 손발 노릇을 하던 승정원과 삼사 관원들을 파직하고 군사권과 인사권을 소론으로 넘겼다. 심약한 줄 알았던 경종의 갑작스러운 일격에 노론은 수세에 몰렸다.
이로부터 3개월이 지나 노론에 결정타를 날리는 고변이 나왔으니 노론 측이, 자객을 보내 임금을 죽이거나 수라상에 독을 넣어 죽이거나 아니면 숙종의 유언을 위조해 경종을 축출하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이 사건으로 노론 4대신이라고 불리던 김창집, 이이명, 조태재, 이건명이 모두 사형당하는 등 노론은 치명상을 입었다. 연잉군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연잉군과 노론이 극적으로 부활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경종의 사망이다.
재위 4년째 되던 어느 날 밤, 경종은 심한 흉통과 복통을 호소하게 되고 의원들의 확인 결과 그날 낮에 먹은 게장과 생감이 원인으로 지목됐다.게장과 생감은 한방에서 상극으로 치는 음식인데 이 음식을 올린 사람이
연잉군이었다. 며칠째 왕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연잉군은 ‘인삼과 부자’를 쓰라고 했고, 어의는 기존 처방과 맞지 않아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며 반대했다. 그럼에도 연잉군이 고집해 인삼과 부자를 썼는데 잠깐 좋아지는 듯하더니 증세가 급격히 악화돼 그날 새벽 사망한다. 보위에 오른 지 4년 2개월, 그의 나이 36세였다.
경종 사망과 함께 세상도 뒤집어졌다. 연잉군이 즉시 왕위를 넘겨받아 즉위하니 조선 제21대 왕 영조다. 그리
고 영조의 지지 세력 노론도 화려하게 부활했다. 경종의 사망은 곧바로 연잉군 게장 진상, 인삼 처방과 맞물려독살 의혹을 불렀다. 영조 즉위 초기 경종의 복수를 내걸며 거병한 이인좌는 청주성을 점령했고 호남과 영남에서도 호응을 받았다. 이후에도 잊을만하면 독살설을 제기하는 괴문서가 나붙어 영조를 괴롭혔다. 경종은 그 자신의 이름이나 업적보다는 장희빈의 아들 또는 독살설의 당사자로 인식돼 왔다.
경종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여전히 미궁이다. 정황은 합리적 의심까지만 허용할 뿐 아직 사실을 확정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장희빈의 비극과 경종 독살설이 조선 후기 극단화된 당쟁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정책 경쟁을 넘어 권력을 쥐면 반대파를 몰살시키는 살육 경쟁으로 치닫던 게 당시 당쟁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 시대의 임금도 신하도 모두가 패자로 살았는지 모를 일이다.
300년이 지난 어느 봄날, 그때처럼 피어나는 봄꽃들을 보며, 무덤 앞에서 뛰노는 천진난만한 어린이를 보며
경종은 후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