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아귀다툼이 사라진 하늘에서 부디 행복하소서
필자가 남양주 사릉을 찾던 날...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조선 초기 정치적 격랑 속에서 속절없이 스러져간 한 여인이 5백 년이 지나도록 한을 풀지 못한 것일까...
눈물이 빗물이 된 듯 산천초목을 적시고 있었다.
사릉은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를 모신 곳이다. 15살에 한 살 어린 단종과 혼인해 중전이 됐으나 1년여 만에 단종이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넘기면서 대비가 되었고 이어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돼 영월로 유배를 떠나면서 영영 이별하게 된다.
단종은 유배를 떠나 불과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녀 나이 18살, 꽃다운 나이에 홀로 되어 길고 긴 세월을 눈물로 지내다 82살 백발노인이 되어 세상과 작별했다. 서울 청계천 위를 지나는 영도교라는 다리!
휴일을 맞아 인파로 북적대는 평화로운 이곳에서 지금으로부터 566년 전 정순왕후는 영월로 유배 가는 단종과 작별했다. 근처의 지명을 따 영미교로 불리다가 성종 때 대폭 보수해서 영영 건넌 다리라는 뜻의 영도교라고 이름 붙였다. 영도교 근처에는 여자들만 모이는 채소시장인 여인시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정순왕후에게 끼니때 채소를 갖다 주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장이 서게 됐다고 한다.
6호선 창신역 부근에는 청룡사라는 아담한 절이 있다. 폐비된 정순왕후는 궁에서 나와 정업원이라는 절에서 살았는데 지금의 청룡사 일대가 정업원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이 청룡사 내 우화루에서 영월로 떠나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룡사 옆에 붙어 있는 조그만 비각이 하나 눈에 띄는데 이 안에 ‘정업원구기’ 즉 정업원옛터라는 뜻의 영조 친필 비석이 보존돼 있다. 정업원에서, 정순왕후뿐 아니라 조선 건국 후 고려 공민왕의 비였던 혜비, 이방원의 왕자의 난으로 죽은 세자 방석의 누나 경순공주도 여생을 보냈다고 하니 왕실 여인의 한이 서린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정순왕후는 단종과 헤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는 근처에 있는 동망봉에 새벽마다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며 흐느꼈다고 한다.
그 동망봉이 지금은 숭인근린공원이라는 시민의 쉼터로 바뀌어 있다. 제법 가파른 길을 오르면 쾌적한 공원이 펼쳐져 있고 공원 남쪽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이 동망정이다. 정순왕후가 영월을 바라보며 올랐다는 동망봉 이야기를 기념해 정자를 지어놓았다. 필자도 잠시 동쪽을 바라보며 그날의 비극을 새겨보았다. 비록 고층빌딩들이 즐비해 풍경은 크게 달라졌지만 17살 소년으로 비명에 간 단종을 그리워하는 정순왕후의 애달픈 마음만은 아련히 전해오는 듯했다.
숭인근린공원을 걷다 보면 정순왕후를 기리는 여러 시설들을 만날 수 있다. 동망각이라는 곳에서 인근 주민들이 해마다 정순왕후를 기리며 제를 지낸다고 한다. 주민 쉼터로 꾸며놓은 곳에서는 바닥에 큼지막한 지도 안내판을 볼 수 있는데 정순왕후와 관련된 인근의 역사적 장소를 표시해 놓았다.
어린이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친숙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순왕후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그린 안내판을 설치해 놓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 존재를 잊었을지 몰라도 이 일대 주민들은 여전히 정순왕후를 기억하고 있었다. 종로구도 해마다 문화제를 열어 추모제와 각종 행사로 그녀의 생애를 기리고 있다. 정순왕후는 궁에서 나온 후 나라의 도움을 일체 거부하고 스스로 생계를 꾸리며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녀의 주 생계원은 옷감을 염색하는 일이었는데 천에 자줏빛 물을 들이던 샘터가 정업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남아 있다.
자주동샘(자지동천, 紫芝洞泉)이라고 불리는데 정순왕후가 천을 샘물에 담그면 저절로 자주색 물이 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여기서 물들인 옷감을 내다 팔아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고 하니 지체 높은 중전에서 내려와 한 여인으로 견뎌냈어야 할 삶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새삼 느껴진다.
정순왕후는 이렇게 단종 사후 64년을 더 살고 백발이 성성한 82살 노인이 되어 남편 곁으로 갔다. 이 64년 동안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까지 5명의 임금이 거쳐 갔다. 자신을 파멸시킨 세조의 경우 장남 의경세자가 병으로 일찍 죽어 왕위를 잇지 못했고, 둘째 아들 예종 역시 일찍 세상을 뜨면서 조선왕 중 두 번째로 짧은 불과 1년 남짓 임금으로 있었다. 결코 순탄하다 할 수 없는 이런 모습을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남편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된 상태에서 사망했기에 정순왕후도 사망 후 군 부인의 예에 맞춰 장례가 치러졌다. 매장지는 남양주의 해주 정 씨 선산으로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시댁인 해주 정 씨 집안이 장지를 제공해 줬다. 그래서 지금도 정순왕후 능 주변으로 해주 정 씨 묘들이 여러 기 자리 잡고 있다.
정순왕후는 이렇게 170여 년을 잠들어 있다가 숙종 때 단종이 왕으로 복권되면서 왕후의 지위를 되찾았다. 무덤도 능으로 승격됐는데, 단종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다는 뜻에서 ‘생각할 사’ 자를 써서 사릉(思陵)이라고 이름 붙였다.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나 15살에 왕비로 간택된 이후 정순왕후 본인은 물론 그녀의 집안도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 송현수는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단종이 죽던 때 같이 죽임을 당했고 식구들은 노비로 전락했다.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비참한 그 시련들을 어떻게 홀로 견디어냈을까?
사릉에서 5백 리 머나먼 땅 영월 장릉에 단종이 묻혀 있다. 소년 소녀 시절에 만난 두 사람은 3년을 같이 지냈을 뿐 수백 년을 헤어져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후손들이 사릉에 있던 소나무 하나를 단종 능 옆에 옮겨와 심고 정령송이라고 이름 붙였다. 세상의 아귀다툼이 모두 사라진 하늘에서 어쩌면 두 사람은 오래전 그 풋풋한 소년 소녀로 다시 만나 영월의 푸른 강과 남양주의 짙은 숲을 거닐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