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산책 오늘은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삼릉을 소개한다. 이곳에는 왕비 2명의 능과 추존왕의 능 하나 공릉, 순릉, 영릉 등 모두 3기의 능이 있다. 앞 글자를 따서 공순영릉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삼릉의 주인들을 살펴보면 뜻밖의 이름 하나를 만나게 된다. 바로 한명회!
여기에 묻힌 왕비 2명이 모두 한명회의 딸이다. 자매가 나란히 왕비가 된 사례는 조선 역사에서 한명회의 딸들이 유일하다. 이 사실 하나로도 한명회의 권세의 크기를 알 수 있다. 먼저 만날 능은 조선 제8대 왕 예종의 첫 번째 왕비인 장순왕후 한 씨를 모신 공릉!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셋째 딸이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고 5년 후, 그러니까 폐위시킨 단종까지 죽이고 왕권을 탄탄히 다지던 때 당시 세자였던 훗날의 예종과 한명회의 딸이 혼례를 올리며 두 집안은 사돈 간이 된다. 한명회는 이 혼사를 통해 왕의 최측근이라는 현재 권력에 차기 왕의 장인이라는 미래 권력까지 예약하게 된다.
1994년 KBS1 드라마 '한명회'에서
세자빈은 혼례 후 얼마 안 가 임신을 하더니 이듬해에 아들, 즉 원손을 낳았다. 한명회의 미래는 더욱 공고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딸은 아기를 낳고 닷새 만에 산후통으로 사망하고 만다. 세자빈의 나이 불과 17살이었다. 이때 출생한 원손이 인성대군으로 그 역시 3살 때 죽고 만다. 세자가 훗날 아버지 세조 뒤를 이어 제8대 왕 예종이 되면서 세자빈 지위에서 죽었던 세자빈도 장순왕후로 격상됐다. 장순왕후의 능은 사망 시 세자빈의 능제에 따랐기 때문에 병풍석과 난간석, 장명등이 생략되는 등 단출하게 조성됐다. 예종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3개월 만에 갑자기 죽고 만다. 불과 20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젊은 왕의 급서였다. 그럼 다음 왕은 누가 이어야 할까? 그 당시 왕실의 가족 관계를 잠깐 살펴보자.
죽은 형 의경세자를 대신해 왕위를 이은 예종은 두 번째 왕비인 안순왕후 사이에서 제안대군을 뒀으니 제안대군이 승계 1순위다. 그리고 의경세자와 인수대비 사이의 큰아들 월산대군이 2순위,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3순위다. 그런데 1순위 제안대군은 나이가 불과 4살, 그렇다면 다음은 월산대군인데 왕위 계승에 대한 권한을 지닌 정희왕후는 3순위인 자을산군을 선택했다. 제9대 왕 성종이다. 월산대군이 16살, 자을산군이 13살이었으니 월산대군이 승계하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는데, 정희왕후는 월산대군이 병약하다는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희왕후가 그같이 결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자을산군의 아내에 그 비밀이 있다. 자을산군의 아내가 한명회의 넷째 딸이었던 것이다. 한명회는 딸 넷을 뒀는데 막내딸을 2년 전에 자을산군에 시집보냈다. 자을산군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문제를 놓고 정희왕후와 한명회 사이에 모종의 협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자을산군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아내도 왕비로 책봉됐으니 그녀가 공혜왕후 한 씨다.
그런데 한명회의 딸들과 얽힌 왕실 족보에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한명회의 셋째 딸이 세조의 아들 예종과, 넷째 딸이 세조의 손자 성종과 결혼한 것이니, 넷째 딸 공혜왕후에게 예종비 장순왕후는 언니이면서 시숙모가 되는 희한한 관계가 돼버린다. 이처럼 한명회는 왕실의 지엄한 족보까지 흔들어놓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맺어 놓은 한명회와 왕실과의 인척 관계에 또 변수가 생긴다. 성종비 공혜왕후가 왕비가 된 지 5년이 채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때 왕후의 나이 19살! 후사는 없었다. 왕비가 된 두 딸이 모두 20살 전에 죽은 것이니 천하의 한명회도 ‘인명은 재천’이라는 섭리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공혜왕후가 죽자 언니 장순왕후 능 근처에 능을 조성하고 순릉이라고 이름 붙였다. 정식 왕비로 사망해 그에 걸맞게 격을 갖춰서 능을 조성했다. 난간석과 문. 무인석 등 각종 석물이 위엄 있게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두 딸을 왕비로 만든 한명회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한명회는 명문 청주 한 씨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칠삭둥이에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친척 집에서 키워지면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세에 대한 욕망은 강했으나 과거에 번번이 낙방해 30살이 넘어서야 미천한 관직을 하나 얻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살던 개성의 개인집인 경덕궁의 관리인 자리였다. 이때 한양 출신으로 개성에 와서 벼슬을 하던 관리들이 송도계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한명회가 자신도 좀 끼워달라고 했다가 “궁지기도 벼슬이냐?”는 비아냥과 함께 거절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백수처럼 지내던 그는 수양대군을 만나면서 인생 대역전을 이루게 된다. 친구인 권람의 소개로 수양대군을 만난 한명회는 김종서 등 단종 보위 세력을 일거에 제거한 계유정난을 기획하고 실행해 세조의 최측근 자리를 공고히 했다. 수양대군을 왕으로 만든 말 그대로 킹메이커였다. 종 9품 말단 궁지기에서 13년 만에 영의정까지 초고속 승진에 막대한 재산 축적, 왕의 사돈이자 장인이라는 인척 관계 등 세조 재위 기간 그는 명실상부한 권력의 핵심이었다. 세조 치세에서 최대 위기였던 이시애의 난 때 역모 누명을 쓰고 잠깐 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곧바로 복귀했다. 다음 왕 예종 때는 원상이라고 불리는 사실상의 섭정 통치의 핵심 멤버로 국정을 좌우했다. 그다음 왕 성종 초반에는 정희왕후가 어린 왕을 대신해 통치하는 수렴청정을 했는데 사실상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공동 통치였다.
한명회의 권력은 성종이 장성해 직접 통치를 시작하면서 기울었다.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겠다고 할 때 반대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는가 하면, 말년에 자신의 호를 딴 정자 압구정에서 중국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려다 성종의 반대로 무산되자 불편한 속내를 비쳤다가 성종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렇게 성종이 한명회를 제어하고 대신들도 등을 돌리면서 점차 권력의 내리막길을 걷던 그는 73살에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힘은 빠졌다지만 큰 곤욕을 치르지 않고 천수를 다했다. 신하로서 상상할 수 없는 온갖 권세와 영화를 다 누린 파란만장한 생애였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 땅에 묻힌 지 17년이 지나 그의 시신은 무덤에서 끌려 나왔다.
성종이 폐비 윤 씨에게서 낳은 연산군이 폐비 논의에 가담했다며 죽은 한명회를 끄집어내 부관참시했다. 조선에 권세를 누린 신하는 많이 있었지만 한명회처럼 극적으로 떠올라 긴 세월 세상을 쥐락펴락하고 간 생애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가 된 인물은 찾기 힘들다. 그가 죽은 지 500년도 훨씬 지났지만 국가가 두 딸의 무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세심하게 보존하고 있는 걸 보면 그의 권세는 세월을 초월해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