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의 이야기

by 김숙희


어느 봄날의 이야기


김숙희


맑게 웃는 해를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이른 아침이다. 새들은 나뭇가지를 파르르 떨며 “짹짹째재재”하고 아침 문안을 한다. 창문을 활짝 열어 상쾌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고 기지개를 켜봤다. 신선한 공기 속에서 봄내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화단에 심긴 사랑스러운 핑크빛 홍매화와, 순백색을 띠고 있는 청매 화는 어제보다 몇 숭어리가 더 피어 정말 예쁘다. 작년 봄에 이웃 분이 주셨던 수선화는 이제 꽃대가 올라오고 있다. 매혹적인 노란 수선화 아가씨의 꽃말은 자기 사랑, 신비, 자존심, 고결이라고 한다. 그녀를 보기 위해 설렘이 일어나고 기다려진다.


눈이 많이 왔던 지난겨울은 혹독한 영하의 날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온기를 주는 봄볕에 모든 생물들은 생기를 받고 일어난다. 어떻게 살아왔을까? 나는 그들에게 묻고 귀를 기울여 본다. 강인한 생명력을 뽐내며 그들이 하는 말은, “인고(忍苦)의 세월을 지나 나는 살아있노라”하고 대답한다. 아침과 봄이라는 조합 속에 스며있는 의미들을 잠시 생각해본다. 이들은 어두움을 이겨내고, 얼어붙어있는 생명을 다시 일깨우며, 황무지 같은 메마름을 개간하고, 희망을 실어주는 원동력이 된다.


한낮의 햇살이 따뜻하게 감싸 안아 몸을 바깥으로 몰아낸다. 실내에 있기에는 아깝고 좀이 쑤셔온다. 햇볕이 좋으니 해야 할 일들이 생각나고 이리저리 부산스럽다. 텃밭에 나가 풀을 뽑았다. 겨우내 눈 속에서 자란 시금치도 한 소쿠리 담아내고, 쪽파도 한 포기 뽑아서 다듬어 놓았다. 이것은 점심에 나물반찬으로 해 먹을 요량이다. 며칠만 더 있으면 뒤뜰에 살포시 얼굴을 내민 머윗잎도 먹을 수가 있겠지. 쌉쌀한 맛이 그리워진다.


집 앞에는 임자가 있다는 묵은땅이 있다. 서울 사람이 사놓은 땅이란다. 그 밭에서 남편이 밭을 일구고 있다. 숨 쉬는 땅과 함께 호흡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건강해 보여 좋다. 2020년 여름은 유독 장마가 길었고, 50여 일에 걸쳐 비만 내렸다. 햇빛을 보지 못한 논밭의 작물들은 힘에 겨워 지쳐있었다. 남편도 건강이 좋지 않아 많이 힘들었다. 다행히 늦가을이 지나자 건강은 다시 회복되었고, 올봄에는 건강한 몸으로 땅을 일구고 있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봄이라서 그런지 몸이 나른해진다. 중천에 떠 있던 해는 그 열기가 약해져가고 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아침나절 하다만 농사 준비를 하느라 마을 곳곳에서는 다시 움직임이 분주하다. 멀리서 들려오는 트랙터의 소리는 묵은땅을 갈아엎느라 힘찬 소리를 내고 있다. 그 소리는 봄이 오는 길목에서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먹어치우는 괴성일 수도 있다. 딱딱해 보였던 묵은땅들이 어느새 보슬보슬하게 떡가루처럼 돼가고 있다. 해가 지기 전까지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린 농사꾼은, 올 해의 농사가 잘 되기를 하늘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였을 테지.

수고의 씨앗이 잘 자라 영글어서 풍성한 결실을 안겨주기를 두 손을 모아본 다.


해는 먼 산 가까이에 붉은 홍시처럼 걸려있다. 하루가 저물어 가는 시점에서 다시 내일이라는 희망을 기대해 본다. 분명 반복되는 일상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늘과 다른 내일이 될 것이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는 힘찬 정기(精氣)를 품고 있다. 그러나 화려하게, 웅장하게, 붉은 채색을 입은 노을은, 하루를 잘 살아냈다는 ‘인내의 꽃’이라고 부르고 싶다.


채석강에 붉은 노을이 하루의 끝을 알리고 있다. 맑은 날에만 눈에 호사를 안겨주는 노을은, 그 빛의 파장을 따라 구름과 조화를 이루며 한없이 경이롭게만 보인다. 고단한 하루의 삶을 정리하듯, 수평선에 잠시 머물다가 서서히 사라져 간 붉은 노을은 정신을 잃게 한다. 그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을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작은 두 눈에는 다 채울 수가 없어 내 입술은 할 말을 잊고 그저 와! 와! 만 외쳤다.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사색에 잠긴다. 인생 여정에 마침표를 찍기 전에 노을처럼 아름다운 족적을 남기기를 소망한다. 흐린 날에는 볼 수 없고, 맑은 날에만 볼 수 있는 것처럼, 주어진 삶을 맑고 깨끗하게 살 것을 다짐해본다. 수평선 밑에서 누군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착시 현상이 일어난다. 노을은 수평선 밑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점점 사라질수록 더 아름다운 노을에게 압도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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