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아

by 김숙희

어둠을 물리치고 새벽동이 트기 시작한다. 빛이 밝을수록 사물들의 정체는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운동 갈 채비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햇살 가득한 하늘도 좋지만, 안개가 옅은 하늘은 운치가 있어 오감을 기분 좋게 소환한다. 이런 날이 운동하기엔 그만이다.


탁 트인 농로를 걷다 보면 야트막한 언덕을 만나 오르게 된다. 한 발 두 발 내딛는 걸음에 따라 건강이 더해진 것 같다. 몸이 후끈하게 더워진다. 보약 같은 바람이 선선하게 피부에 닿자, 몸이 금방 시원해졌다. 살랑살랑 몸에 닿은 촉감이 아가의 보드라운 머리털과도 같다. 아직 운동하기엔 아침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하늘거리는 들풀들은 사랑스럽게 흔들댄다. 바람을 좋아해서 춤바람이라도 난 것일까. 너른 들녘은 모심기가 끝자락인가 보다. 모를 심어놓은 기다란 네모판 논들은 정비를 잘해놓은 탓에 참 보기가 좋다. 일렬로 줄지어 있는 모들이 가지런한 수염 모양을 이루고 있다.


옛날 어르신들 말씀이 모내기철에 피죽바람이 불면 큰 흉년이 든다고 하셨다. 이 몹쓸 바람이 불면 흉년 때문에 피죽 먹기도 힘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 피죽바람은 만들어지지 않기를 소원한다.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어 그런지 바람은 하루에도 수시로 변덕을 부린다. 아침나절에는 명주처럼 보드라운 바람이 살랑대며 찾아온다. 이러면 마음도 차분해져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어서 오라고 영접한다. 그러다가 오후가 되면 변덕스럽게 거세지면서 큰 나무들은 몸을 이기지 못해 이리저리 휘청거린다. 나무가 바람에게 저항하는 모습일까, 아니면 부는 대로 순응하는 것일까.



인생을 나무에 비유하건대, 어떤 나무든지 바람에 흔들려보지 않은 나무는 없는 것 같다. 살아온 인생길에는 많고 많은 역경들이 굳은살처럼 박혀있다. 휘도는 인생길 굽이마다 마시기 힘든 쓴 잔을 마셨고, 맵디매운 고추바람이 지나갈 때, 눈물 콧물 다 쏟아냈던 아픔들이 있었다.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개로 지우고 훨훨 날아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 휘몰아치는 인생 바람은 그 누구도 막아낼 재간이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은 오래 머물지 않고 나그네처럼 훨훨 떠나갔다. 바람에 휘청거렸던 몸을 추스르고, 눈물을 닦아내며 오뚝이처럼 일어섰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바람이 없는 날, 나무는 무척이나 심심하게 보인다. 친구 같은 잔잔한 바람이 놀다가기를 청해 본다. 인생의 삶도 바람이 없으면 무미건조하게 지나간다. 아무 움직임이 없다면 바람도 일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있기에 바람도 존재한 것 같다. 바람은 변덕쟁이다. 어떤 날은 화가 났는지 분노조절이 안될 만큼 흔들어 놓기도 하고, 어느 때는 몰래 찾아와 살랑살랑 불어주는 예쁜 딸의 애교와도 같다.


운동하는 동안 바람은 내 안에 들어와 있다. 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지만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은 바람, 분명 너의 존재는 있다. 너는 투명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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