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 作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있다. 주인공 기 롤랑은 10년 전에 갑자기 부분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에서부터 잃어버린 과거를 향해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다. 어느 날 스티오파 드 자고리에프가 두 장의 사진을 건네줬다. 두 장의 사진은 자신의 정체성을 환기시켜주는데 하나의 단서가 되었다. 또 한 사람이 있다. 하워드 드 뤼즈 씨의 정원사 겸, 운전사였던 로베르 씨다. 그도 사진이 들어 있는 비스킷 통을 기 롤랑에게 건네준다. 기 롤랑은 몇 장의 사진들을 통해 기억에서 지워진 사람들을 하나씩 알아간다.
자신의 모든 과거를 다 기억하고 살 수는 없다. 기억은 시간에 따라 때로는 희미하게, 안개처럼 머물다가 바람같이 사라져 간다. 하지만 사진이 주는 효과는 기억 너머의 과거를 상기시켜주는 귀중한 증거물이 된다. 그리고 시간이 오래된 사진일수록 가끔씩은 그 아련함에 빠져들기도 한다. 50-60년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이라면 웬만한 흑백사진 한 장쯤은 소장하고 있을 것이다. 흑백사진은 과거라는 표면적인 사실을 담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깊은 정감이 배어있다.
세월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2월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이었지 싶다. 종로 3가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서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밀치는 순간이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 얼마 후 안내방송과 함께 내려야 할 정류장이 다가왔다. 그런데 카드를 찍기 위해 지갑을 찾았으나 지갑이 없었다. 등골에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정류장에 내려서 다시 가방을 뒤지다 보니 가방 한 귀퉁이가 찢어진 채 있었다.
1965년 어느 날, 아버지는 다섯 살 된 딸을 데리고 KBS 광주방송국을 둘러보러 가셨다. 집으로 가는 길에 사진관에 들르셨고, 귀여운 딸을 무릎에 앉혀 한 장의 사진을 남기셨단다. 나는 너무 어린 나이여서 그때를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이후로는 어릴 때 모습을 가끔씩 들여다보며, 상상 속의 추억을 그려 놓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사진에 대해 정을 느끼게 되고, 보물처럼 여겨 지갑 안에 소중히 간직하게 됐다.
그런데 너무 속상하게도 그날 버스 안에서 지갑을 소매치기당하고 말았다. 너무나 황당했다. 그 상황 속에서 지갑 안에 있는 돈은 나중 일로 밀리고, 아버지와 찍은 단 하나뿐인 사진이 없어져 울고 또 울었다. 가진 돈을 다 털어도 살 수없는 귀한 사진이 이제는 없어졌으니 얼마나 속상하게 됐는지 말이다. 이후로 사진은 기억 속에만 갇혀있게 되고,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슬픈 현실이 되고 말았다.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의 주인공이 옛 사진을 들고 잃어버린 과거를 기억하고자 무척이나 애쓰고 있었다. 이때 나에게도 의도치 않게 한 장의 흑백사진이 떠오르는 것이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무표정을 짓고 있는 여덟 살 된 나와, 세발자전거를 타고, 배시시 웃고 있는 다섯 살 된 남동생과의 사진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 얼마나 빛이 바래 있을까. 아련하여 잡히지 않을 것 같은 그때가 살며시 생각 속으로 찾아왔고, 그 사진이 보고 싶어졌다. 언젠가 이 사진을 동생이 챙겨갔던 게 생각이 난다. 그리고 기억하지 못한 옛날 사진이 또 있을까 해서 오빠에게 전화로 물어봤다. 돌아오는 대답은 다른 사진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후 오빠는 동생에게 가지고 있는 흑백사진을 나에게 보내라고 했단다.
“카톡”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동생이 보낸 것이었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 아니 이럴 수가! 분명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한 장의 사진을 기다렸는데 두 장의 사진을 받았다. 한 장의 사진은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다행히 인물에는 훼손이 없는 남동생과 찍은 사진이었다. 여전히 꽃무늬 원피스에 무표정을 짓고 있는 나와, 세발자전거를 타고 배시시 웃고 있는 남동생이다.
다른 한 장의 사진에 나는 무엇엔가 홀린 것만 같았다. 그것은 바로 20여 년 전에 소매치기를 당해 잃어버린 아버지와 찍은 사진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인지, 표면 여기저기에는 실금이 가있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너무 반가웠고, 눈시울을 붉히며 사진을 한동안 들여다봤다. 나를 안고 계시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 뵈는 것만 같은 감격의 기쁨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무릎에 앉아 양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있던 어린 나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게 현실일까? 꿈일까? 불가능하게만 느껴졌던 일이 기적과 같이 찾아왔다. 어떻게 이 사진이 동생에게 또 있지? 사진에 대한 궁금증이 더 깊어져 갔다. ‘아마도 사진관에서 두 장을 인화해서 줬나 보다’ 하고 추측이 간다. 다시 내게 돌아온 사진과 함께 20년 전이 되었다. 과거를 담고 있는 아버지와 찍은 단 한 장의 흑백 사진은 그 시간에 고정돼 멈춰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 속 시계는 고장 났으니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남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누나! 그때 그 소매치기가 혹시 내가 아닌가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