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손님

by 김숙희


여름 손님


김숙희


7월이면 우리 집 앞마당에는 청포도가 주렁주렁 열린다. 많은 포도 알갱이 수만큼은 아니어도 손님들이 제법 찾아주셨다. 청포도를 보니 이 육사의 시〈청포도〉에 나오는 ‘손님’이란 시어가 연상되며, 청포도가 열리는 계절에 다녀간 손님들이 생각난다.

뜨거운 햇볕은 이글거리고 후덥지근한 습도는 피부 표면에 닿아 끈적인다. 입에는 덥다는 소리가 반복해서 나오는 녹음기를 달았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목 줄기를 타고 내려온다. 아직 초복이 오려면 보름께나 있어야 하는데, 벌써부터 한낮 온도는 32도다. 몹시 덥지만 오시는 반가운 손님들이 있어 이 모든 불편함을 뒤로하고 준비에 나섰다.


저녁 9시만 되면 무척 힘들어하는, 초저녁 잠 많은 새벽 형 인간이다. 동틀 무렵에 기상해서 바구니 옆에 끼고 텃밭으로 갔다. 낮 더위를 피하기 위해 준비에 나서는 방비책이기도 하다. 어제 서산을 넘어 자취를 감췄던 그 해님이, 동편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둥둥 떠오르고 있다. 이슬은 부끄러운 새색시가 되어 초록 이파리들 위에 살포시 앉아있다. 옆을 돌아서 한 발짝을 옮기는데 개구리 한 마리가 펄쩍 뛰어 줄 행량을 친다. “엄마야”하고 놀라 넘어질 뻔했다.


들깨 향이 진한 깻잎 순을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코끝에 감도는 향기가 너무 좋아 바구니에 얼굴을 묻고 눈을 지그시 감아본다. 살짝 데쳐서 들기름에 볶으면 참 맛있을 것 같다. 보라색 가지와 길쭉한 애호박이 눈에 띄어 이것 또한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상추와 풋고추도 따서 담아놓으니 여름 반찬거리가 바구니에 소복하다. 호박밭에 너울거리는 호박잎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쪄서 강된장과 쌈 싸 먹으면 그 맛은 여름 반찬 중에 최고가 되기 때문이다. 어슷하게 썰어서 볶아낸 애호박나물, 찜 기에 쪄서 참기름에 무친 가지나물, 들기름에 볶아 향이 그윽한 들깻잎 나물, 얼음을 동동 띄운 새콤 달콤 맛있게 시원한 오이냉국, 또 제육볶음에 싸 먹을 푸른 잎 상추와 풋고추, 넓적한 맷돌을 닮아 맷돌이라는 이름을 붙인 맷돌호박잎도 쪄서 , 강된장과 곁들어 놓으니 소박한 시골밥상이 완성됐다.


건강한 상차림이라고 손님들은 즐겁게 식사를 한다. 시골이라는 정서적 환경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이라고, 똑같은 채소반찬이지만 시골에서 먹는 맛은 정감을 불러내기에 충분하다고, 다들 한 말씀씩 곁들어준다. 음식이 주는 행복을 손님들 표정 속에서 읽을 수 있었다. 사람은 씨앗을 심었고, 땅은 싹을 내주었으며, 사람은 풀을 매는 수고를 했더니, 땅이 주는 결실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준다.

식사를 마친 손님들은 솔잎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 후 집으로 돌아갔다. 보고 싶어서 더운 여름을 마다하지 않고 먼 길을 달려와 준 손님들이 한없이 고마웠다. 그리움은 시 공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불러오고, 오는 사람과 맞이하는 사람이 그리움이라는 틀 안에 혼연일체가 됐다. 옛날 속담에 ‘오뉴월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더운 오뉴월에는 손님 접대가 무척 어렵고 힘들어서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혹서(酷暑)와, 혹한(酷寒)이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니, 그 사람들만 느껴지고, 더위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은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따듯함이다.


손님들은 잠시 머물다가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자연이 건네준 선물을 통해 정신적 치유를 얻었을 것이다. 우리는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고, 오고 가는 대화 속에 끈끈한 정이 무르익어갔다. 돌아간 흔적 뒤에 반드시 찾아오는 허전함은 사양하고 싶다. 보내고 난 자리가 빈 둥지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휑한 공기가 가시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 손님들이 가져온 선물들에게 눈 맞춤을 하고, 쓸쓸함을 달래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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