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동네의 낮은 산만 다니다가 무리에 속해서 이름난 명산을 가보는 것도 신나는 경험이다. 산행지기는 칼바위 구간만 지나면 크게 어려울 것 없는 3-4시간 코스라고 했다. 중간중간 탈출로가 있으니 너무 힘든 사람은 내려갈 수 있다는 말도 해주었다. 선과 나는 첫 소풍을 가는 유치원생처럼 들떠서 “칼바위”와 “탈출로”라는 단어의 불길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발걸음도 가볍게 재잘거리며 산을 올랐다. 얼마쯤 지났을까? 대화 소리는 끊기고 사방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 우리는 어느새 네발로 산을 타고 있었다.
아름답고 편안한 등산로는 사라지고 경사 60도는 될 법한 산비탈과 거대 암석들이 펼쳐졌다. 나를 비롯한 초보자들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위태롭고 숨 가쁘게 선두 무리를 뒤따르고 있었다. 키 높이 배낭을 장착한 선배들은 날다람쥐처럼 가볍게 산을 오르는데 중력은 오로지 나에게만 작용하는 듯 두 다리가 천근만근 마비가 올 것 같았다. 대체 휴식시간은 언제란 말인가? 수려한 경치 구경은커녕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살짝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안전장치도 없는 절벽의 암석 구간이 나오자 패닉 상태가 되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선의 옆모습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것이 정녕 초급 등산코스란 말인가?! 북한산은 초보가 갈만한 산이 아니었는데 나의 무지로 인해 오늘 산에서 줄초상을 치르게 생겼다. 다행히 앞서가던 산행지기가 위험한 구간에 서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우리는 아찔하고 무서운 칼바위 능선을 지나서야 겨우 휴식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
탈진한 상태로 주저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널브러진 초보자들과 여유로운 숙련자들의 모습이 확연히 대비가 되었다. 선과 나는 마주 보며 “괜찮아?” “안 괜찮아.” “집에 가고 싶어.”를 소곤대며 심각한 표정을 주고받았다. 동네의 낮은 산만 생각했지 이런 극한의 유격훈련이라니. 선은 내일 회사도 못 나갈 것 같다고 울상을 지었다. 그때였다. 마스카라가 얼룩 진 초보자 한 명이 산행지기에게 다가가 말을 꺼낸 것은.
“저.. 죄송하지만 그만 내려가고 싶은데 돌아가는 길은 어느 쪽인가요?”
빙고! 나는 쾌재를 부르며 속마음을 대변한 그녀와 동화되어 산행지기의 입을 쳐다보았다.
“아~ 3분의 1은 왔는데, 도저히 못 가시겠어요? 이제 힘든 구간 별로 없는데..”
산행지기는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느긋한 목소리로 등산을 완봉할 것을 설득했다.
“그래도.. 저기 너무 힘들고 지쳐서요..”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독야청청님이 하산하는 길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선과 나는 슬그머니 눈짓을 하며 몸을 일으키다가 이어지는 산행지기의 말을 듣고 도로 주저앉아 버렸다.
“가장 빠른 길은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칼바위 능선 길로 가이드해 주시죠”
“.....”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했던 일을 다시 하는 것이다. 생명의 위협마저 느꼈던 그 길로 다시 돌아가느니 차라리 전진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체력은 바닥났다고 느꼈지만 이를 악물며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운동량을 초과 달성한 선도 비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애처롭고도 희극적이었을까? 시커먼 산사나이 들은 얼굴 근육까지 씰룩이며 웃음을 참느라 헛기침을 해댔다. 초보자들에겐 어렵지만 숙련된 등산가들에게는 시시한 이 코스를 왜 따라왔나 의아했는데 바로 이런 재미난 구경 때문이 아니었을까.
힘든 구간 별로 없다더니 그 후로도 우리는 몇 번의 깔딱(?) 고개를 지나 간신히 정상 부근에서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다. 나의 첫 북한산 등정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충격과 공포, 후회, 원망, 분노, 탈진,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산 위의 만찬”이 되겠다. 등산모임에 의외로 뚱뚱한 사람이 많은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다. 산 위에서의 달콤한 식사는 극도로 고된 등산을 감수할만한 충분한 가치와 목적이 되는 것이었다.
점심시간. 다이어트 중인 선은 야채와 주먹밥을 담은 소박한 도시락을 꺼냈다. 위장장애를 포함한 다양한 질환을 앓고 있던 나 역시 간단한 죽과 과일만 가져왔다. 입맛도 없고 소화도 못 시키던 상황이라 식도락을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런 내 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산 사나이들의 키 높이 배낭에서는 출장 뷔페라 해도 좋은 음식들이 꺼내져 나왔다. 김밥과 라면은 물론이고 족발, 군만두, 월남쌈, 치킨, 순대, 빵, 야채, 과일 샐러드까지 순식간에 돗자리에 가득 세팅되었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콩물을 직접 갈아서 온 식객님. 식당을 운영하신다더니 스케일이 정말 남달랐다. 설마 북한산 정상에서 콩국수를 먹게 될 줄이야. 그렇다. 이 모임은 등산을 가장한 식도락 모임이 분명했다. 얼떨결에 손에 들린 콩국수를 보라. 얼음을 띄운 뽀얀 콩물에 하얀 소면, 그 위에 정갈한 오이채까지 거의 완벽에 가깝다. 고된 등산 끝에 오는 달콤한 음식의 유혹은 악마보다 강하다. 얼마 전에 위내시경 했다는 사실도, 숙원의 다이어트도 산 위의 만찬 앞에 속절없이 날아가버렸다.
여러모로 잊을 수 없는 첫 북한산 등산을 마치고, 나는 무사히 살아 돌아왔음에 감사했다. 2차 뒤풀이로 막걸리에 파전을 먹을까 닭백숙을 먹을까 치열한 논쟁을 하는 식도락, 아니 등산 모임의 선배들을 뒤로하고 집에 와서 그대로 기절하듯 쓰러져 잠을 잤다. 아주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고.
그 후로도 몇 번 더 등산 모임에 참여했지만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건 제일 처음 갔던 북한산 등산이다. 그리고 평생 잊지못할 콩국수의 맛. 그때의 콩국수를 다시 한번 먹어볼 수 있을까? 문득 북한산이 너무나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