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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Mar 25. 2022

A의 꿈

3월 : 내가 생각하는 꿈에 대하여


그리움을 담는 그릇도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꿈은 무의식을 반영하고, 그 무의식중엔 그리움도 있을 텐데. 어떤 그리움은 꿈으로 발현되지 못하고, 우리는 매개 없는 투명한 그리움만을 그리며 살아가곤 한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의 무의식은 그리움을 잊은 걸까?









이것은 A의 두 번째 죽음이었다.


아니 정확히 두 번째 죽음은, 나에 의한 것이었다.



A가 색을 죄다 빼앗긴 채 영안실에 누워 있었고, 그게 내가 목도한 A의 첫 번째 죽음이었다. 듣던 대로 버석하진 않았다. 오히려 돼지껍데기처럼 피부는 탱글거렸다, 생기가 없었을 뿐. 사실 그게 더 끔찍하긴 했다. 혼이 죄다 빠져나간 듯한 촉감이 지문을 타고 혈관으로 쭉 미끄러지는 것 같아서, 그때 나는 A가 죽은 걸 알았다.



A는 천천히 모든 것을 정리했다. 비스듬히 누워 있거나 앉아서 티브이를 켜던 가죽이 벗겨진 파란 소파가 가장 먼저 치워졌고, 아침을 먹기 전 그리고 저녁을 먹은 후 손안에서 굴리던 호두껍데기는 그와 비슷하게 사라졌다. A는 죽기 전 이사를 했다. 자신의 향을 가득 머금은 오래된 집을 정리하고, 습관과 물건을 처분하고, A는 아무 향기가 배지 않은 하얀 공간으로 이사했다. 죽음을 예견한 사람처럼 A는 완벽히 준비했고, 나는 A를 찾아가는 빈도를 줄였다. 한 달에 한 번, 석 달에 한 번, 그렇게 줄여가다가 마지막으로 마주한 것은 6개월 전이었다.



A는 그리워할 것들은 남기지도 않고 그렇게 사라졌다. 매정한 사람. A는 내가 그리워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고해성사를 하듯 후회를 읊조리면서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다. 쥐고 울 게 없어서 나는 A가 위치했던 모서리를 자주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꿈은 무의식을 반영한다던데 꿈엔 머리카락조차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내 무의식은 A를 죽였다. 나는 그게 A의 두 번째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두 번째 죽음을 막기 위해서 힘껏 노력했다. 마치 잠시 호흡을 멈추게 해 주는 물약을 먹고 곤히 누워 있는 줄리엣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A가 목에 걸린 사과 조각을 뱉고 숨을 몰아쉬며 일어나길 바라면서 혹은 평소처럼 물을 달라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얘기하길 바라면서, 나는 곁에 누워 꿈을 꿨다.



꿈은 지겹고, 지루하고, A는 프레임도 못 쫓아왔다. 나는 A가 있을 만한 곳을 다 가본 듯했다. 지상 7층에 있었는데 지하라고 불리는 어두운 구멍 속으로 가보고, 죽은 이들을 잔이라고 부르는 성벽에 걸려 전쟁의 서막을 지켜 보고, 빛을 다각으로 굴절시키는 창문이 달린 방에 갇혀 불을 켜려고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가, 데스티니라고 써진 촌스러운 회색 티셔츠를 입고 우주 민원을 해결하고 화성의 수도꼭지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녔는데 A는 거기서도 지 했던 것처럼 굴었는지 호두 껍데기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로또 꿈이라도 꾼 것마냥 눈 시뻘게가지고, 인지능력 온오프도 제대로 구분 못 하는 뇌 가지고 수첩에 열심히 써 내려간 기록도 다 부질없었다. A가 아직 죽진 않았단 걸 증명하고 싶었는데 족족 실패했다. 어쩌면 깜짝 이벤트를 좋아하는 A는 열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시월 삼십 일일이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망자가 돌아오는 날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그런 소문은 언제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됐기 때문에 A가 날을 맞춰 오기 위해 고요히 함에 갇혀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목에 걸린 사과는 죄다 녹았을 게 뻔하고 물약도 이쯤이면 알아서 해독됐을 텐데. A는 현실에서도 죽고 또 나에게서도 죽은 듯했다.





아니 어쩌면, 사실 이미 죽은 게 분명했다. 이건 횡단보도 앞에서 알았다. 문득 A의 웃음소리가 생각이 안 났고 그다음엔 목소리가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났다. 눈썹이 아치형이었는지 일자였는지 그리고 눈이 내려갔는지 올라갔는지, 손가락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이런 것들이 죄다 뭉개진 몽타주처럼 아른거렸다. 가장 아름다웠던 웃는 표정은 노랗게 번졌다. 그마저도 아득해 보였지만.  



그렇게 A는 두 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하얗지도 까맣지도 않았고, 재처럼 날리거나 돌처럼 가라앉지도 않고


유예는 길었는데 그걸 마무리하는 과정은 파일 하나 휴지통에 넣는 것처럼 싱거웠다.





사실 나는 A가 있는 곳에 가지 않았다. A는 거기에 없기 때문이다. 잠들지 않았고, 있지도 않았다. 사람은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하나는 우리가 보고 만지는 육신이라면 또 다른 하나는 무형의 어떠한 것. 그것은 떠난 뒤에도 그 사람과 마주하고 감정을 공유한 사람들 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나는 내 속 깊숙이 있는 또 다른 A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A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A가 이부자리 정리하는 것처럼 나에게 공유하고 있던 A의 또 다른 분신을 차곡차곡 접어 겨드랑이에 끼고 갔나부다 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시월 삼십 일일에 돌아오지 않는 너를 보며, 그때쯤부터는 꿈에 집착하지도 않았고 네가 죽었다고 시인할 수 있었다.



그런 네가 다시 돌아온 건 놀랍고도 담담한 일이었다. 네가 차렵이불처럼 접어 간 줄 알았던 너는 내가 대청소하듯 먼지 털 땐 어디 숨어 있다가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노린재가 붙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동네 아이들이 더 이상 찾지 않는 초록 그네. 그곳에 너는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좀 더 헐거운 노란 그네에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서늘한 저녁임에도 넌 혼자 따뜻한 시간에 존재하는 듯했다. 그네와 함께 몸을 가볍게 흔들다가 A는 그렇게 사라졌다.



천성이 매정하지 못했다. 그리워할 수 있을 때가 되어야 A는 안부를 전하고 사라졌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A의 마지막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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