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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May 19. 2022

엄마라는 이름 속 가려진 꿈들에 대하여

5月 : 오월에 꾸는 꿈

「초파리 돌보기」의 원영, 「시선으로부터,」의 심시선, 「라이팅 클럽」의 김 작가.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누군가의 ‘엄마’라는 것이다. 각각의 이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저 ‘엄마’라고 불린다.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는 너무나도 무겁다. 이들 중엔 어느 날 생긴 새로운 이름 탓에 진짜 이름을 잃은 이도 있고, 자신의 꿈을 잃은 이도 있다. 또, 꿈을 지키기 위해 ‘엄마’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손가락질받은 이들도 있다. ‘엄마’라는 공통점으로 묶인 이들이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들의 꿈에 귀를 기울이며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엄마’라는 호칭과 그들의 진짜 이름을 분리해보려고 한다. ‘엄마’이기 이전 이들의 삶과 ‘엄마’라는 이름 속 가려진 꿈들에 대해 주목해보려고 한다.


원영의 꿈 – 임솔아의 「초파리 돌보기」 속 원영


초파리를 돌보는 원영의 모습과 함께 소설은 시작한다. '오십대 무경력 주부'로 취급받던 원영은 감정 노동이 심한 텔레마케터 업무를 그만둔 후, 과학기술원 실험동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원영은 평생 자기 일을 갖기를 원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삼십삼 년 동안 그 꿈을 키워왔다. 가발공장, 외판원, 마트 캐셔, 초등학교 급식실 조리원까지 수많은 직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겪어온 노동의 결과는 “왜 일을 하느냐, 학원비 몇 푼 버느니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편이 낫지 않냐”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노동으로 여겨졌다. 이후 실험동에서 일하게 된 원영은 초파리의 먹이를 만들고 양육을 담당한다. 평생 가족을 위한 밥을 만들고, 그들의 양육을 담당하던 원영은 이제 초파리를 돌본다. 초파리를 기특하게 여기며 딸을 키울 때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이 키운 초파리가 하버드와 예일 대학에 수출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하트 모양의 눈을 가진 초파리를 예뻐한다. 하얀 가운을 입은 채 현미경과 시험관을 사용한다. 과학기술원 학생들이 이용하는 학내 식당에서 푸짐한 학식을 먹고, 휴식 시간에는 연못과 동산을 산책한다. 원영은 오랜 꿈이 이루어졌다는 기분을 느낀다. 다짜고짜 욕을 하는 고객도 없고 욕을 듣고도 상냥한 홍보를 할 필요도 없는 곳에서. 이천오백 종의 초파리만이 살아 숨 쉬는 공간에서. 원영은 꿈을 꾸었다.


이후 소설은 십 이년 후, 원영의 모습을 보여준다. 원영은 실험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후 극심한 탈모와 식이장애를 겪는다. 두꺼운 겨울 옷 속 원영의 몸은 앙상해진 지 오래고, 머리부터 코털까지 체모가 사라져 버렸다. 원영의 딸 지유에게 초파리를 보여주기 위해 실험동에서 죽은 초파리를 가져온 후부터 원영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초파리 실험동은 원영의 마지막 꿈이 되었다. 더 이상 취업을 시도하지도, 또 다른 꿈을 찾아가지도 않았다. 지유는 원영이 겪는 병의 원인이 초파리 실험실에 있다고 여기며 의심하기 시작한다.


소설을 쓰는 지유는 원영이 겪는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소설 속 인물이 필요하다며, 원영에게 질문을 던진다. 매일 같이 전화를 해 실험동에 대해 질문을 한다. 사람의 몸을 아프게 할 만한 것들을 본 적 있었냐고. 동료의 이름은 무엇이었냐고.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은 없었는지. 잊고 있는 것이 분명 있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원영은 자신의 꿈이 이루어진 곳이었던 초파리 실험동에 대해 왜 나쁜 방향으로 글을 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원영은 원치 않는 상상을 하게 된다. 원영의 기억을 지유가 훼손하고 있다고 여긴다. 결국 원영은 소설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척 실험동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텔레마케팅 사무실에서 헤드셋 너머로 종일 욕을 듣는 여자 이야기. 평생 자기 책상을 가져보지 못해서 아프기 시작한 여자 이야기. 식기세척기를 구입하면 어떻겠냐고 물으면서도 책상이 필요하지 않느냐고는 한 번도 묻지 않는 가족 이야기. 밀가루가 체질에 맞지 않아 늘 위무력증에 시달렸지만 남편이 국수를 좋아해서 삼십 년 동안 국수를 먹은 여자 이야기, 체 할 때마다 그러게 왜 국수를 먹느냐고 다그치던 딸 이야기. 그러면서도 일요일 저녁이면 와, 국수다, 라며 손뼉을 치던 딸 이야기...” 초파리를 돌보는 경험을 온전히 간직하기 위해, 자신의 병은 이러한 아픔이 축적된 것이라며 이야기를 꺼낸다. 경력 단절과 돌봄 노동 사이에서 평생 갇혀 지낸 원영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해방감을 경험한다. 사소해서 무시했다고 여겼으나, 잊지 못한 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는 아픔의 순간들을 다시금 꺼내며 후련함을 느낀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후 원영에게도 사소한 변화가 찾아온다. 지유에게 먼저 전화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사소하면서도 낯선 이야기를 전하며 얼마나 썼냐고 묻는다. 결말이 써지지 않는다고 얼버무린 지유에게 원영이 깨끗하게 다 나아서 건강해지는 결말을 써달라고 이야기한다. 초파리를 잃고 병을 얻은 원영에게 해피엔드라는 새로운 꿈이 생긴다. “털이 식물처럼 쑥쑥 자라나고 온몸에 근육이 탄탄하게 붙는 해피엔드”를 꿈꾸게 된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꿈. 지유는 원영의 병에 대해 캐묻고 원인을 찾으려 애쓰기보단, 원영을 위해 시시한 문장으로 해피엔드를 선물한다. 이원영은 다 나았고, 오래오래 행복하다는 말로 원영이 계속해서 꿈을 꿀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지유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원영은 우연히 초파리에게 로열젤리를 투여하는 실험에 대한 기사를 발견하게 된다. 초파리의 산란 능력과 수명이 늘어난 실험의 결과를 본 원영은 로열젤리를 먹기 시작한다. 원영의 팔뚝에 하얀 솜털이 자라기 시작했고, 목덜미에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해 굵어져 갔다. 누군가 자신을 쳐다볼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시작했고, 바깥을 걸으며 꽃 사진을 찍곤 했다. 지유가 쓴 소설의 원영처럼, 원영 역시 해피엔드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녀를 구원한 것은 무엇일까. 탈모약과 생숙탕, 천일염 등의 치료법이 아니다. 지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 그리고 초파리를 돌본 순간들을 잊지 않은 것, 초파리에 대한 자료를 모아둔 것. 해피엔드에 대한 꿈을 바란 것. 이 모든 순간이 층층이 쌓여 이루어진 게 아닐까.


심시선의 꿈 -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 속 심시선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을 담은 소설인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 이 소설의 제목 ‘시선으로부터’는 삼대 이야기의 주축이 되는 주인공 심시선의 이름이기도 하며,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이끌어나간 ‘심시선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가 담겨있음을 드러낸다.  


목차가 없는 소설이다. 시선으로부터 시작되어 뻗어나간, ‘심시선 가계도’가 담겨있을 뿐이다. 두 번의 결혼으로부터 형성된 독특한 형태의 가계도. 시선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하와이로 떠나며 소설은 시작된다. 가계도에 존재하는 열두 명의 가족, 심시선의 딸과 아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가 모두 모여 하와이로 떠난다. 소설은 하와이에서의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과 심시선의 이야기를 함께 보여준다.


왜 하와이인가. 그곳은 심시선이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간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국 전쟁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하와이로 향해 화가의 꿈을 키워나간다. 그러던 중 독일에서 여행 온 화가 마티아스 마우어를 만나 독일로 가게 된다. 타인의 눈에 비친 심시선은 우리 시대의 여성들을 표상하고 있다. 마녀사냥의 표적이 되고, 이름을 잃게 된 여성들. “바깥 물” 좀 마신 여자, 표독스럽고 기 센 여자, 유명 아티스트의 뮤즈이자 누드모델, 그런 그를 삼켜 버린 마녀, 재혼한 여성, 시대에 맞지 않는 예술가. 그녀를 지칭하는 이름은 매우 다양했다. 보편적 사회상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손가락질받았고, 진짜 이름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타인의 시선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시선을 그려 나갔다. 제국주의와 전쟁의 피해자, 살아있는 역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을 견뎌낸 여성, 먼저 떠난 동료들의 기록관, 가부장제 사회에서 모계 중심 가정을 꾸린 가장, 버텨낸 삶의 흔적을 자신의 입으로, 손으로 기록한 작가였다.


가족들은 시선의 10주기를 맞아 그녀를 기린다. 고인의 사진 앞에서 규율과 규칙에 맞추어 상을 차리는 형식 따위의 제사가 아니었다. 시선의 흔적이 남아있는 하와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그곳을 여행한 후 추억할 만한 무언가를 하나씩 찾아와 그것을 제사상에 올린다. 가족들은 섬 곳곳에 남아있는 그녀의 궤도를 따라나선다. 하와이를 누비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아픔과 고통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들의 고민과 상처는 시선이 오롯이 감당해왔던 아픔이기도 하다. 전쟁의 아픔을 겪은 시선이 새로운 꿈을 찾아나갔던 곳에, 폭력과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어떻게든 버텨내 살아남은 가족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아픔을 공유한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죽지 않는 공간에서 위로를 나눈다.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가족들의 기이한 제사를 보여주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각자 찾아온 의미 있는 것을 보여주고 심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시선의 죽음을 기리지만 마냥 슬퍼하지 않았고, 각자 삶의 기쁨과 행복을 찾아 나누며 하루를 만끽했다. 그리고 시대의 폭력을 버티며 많은 것을 일궈낸 시선의 긍지를 되새기고, 단단하고 특수한 성향을 물려준 뿌리로서 시선을 기억하게 된다.


소설 「시선으로부터,」는 봉건적 제도와 소문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킨 심시선, 강한 책임감으로 혼란스러운 20세기를 버텨낸 그녀의 자식들과 “공기가 따가운” 한국 사회를 견뎌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장해나가는 자녀들까지 아름답고 단단한 삼대의 이야기를 그려내며 나름의 위로를 전한다. 가부장제에서 벗어난 여성이 모계 중심 가정을 꾸리고, 그 가족들이 특수한 결을 지닌 채 살아가는 모습이 나타난다. 폭력적이고 부당한 사회로부터 평화롭고 온건한 방식으로 서로를 지키는 시선을 보여준다.


김 작가의 꿈 - 강영숙의 「라이팅 클럽」 속 김 작가


「라이팅 클럽」 속에서 이름은 곧 정체성이며, 이는 글쓰기와 연결된다. 영인은 자신의 엄마를 ‘엄마’라는 호칭 대신 ‘김 작가’라고 부르곤 했다. 제대로 된 소설을 쓰지 않았던, 혹은 영인에게 글쓰기로 인정받지 못했던 주변 인물은 대부분 이니셜로 등장한다. 다만, S 선생님은 ‘장(jean)’으로 불린다. 타인에 의해 가짜 이름이 붙은 그는 글을 쓰지도 못했다.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를 품은 채 헤컨색의 라이팅 클럽을 찾은 회원들의 이름은 이니셜 대신 제인, 레오폴드, 앨리스 등 그들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나 혼자 떠받치고 있는 무겁고 불가해한 지구라는 행성과 도무지 사회성이라고는 없는 철부지 김 작가, 그 두 가지가 나를 감싼 세상의 전부였다.”


영인의 엄마는 ‘엄마’라는 보편적인 호칭 대신 ‘김 작가’라고 불린다. 소설 내내 ‘김 작가’로 통한다. 영인의 인생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영인이 중학교 2학년일 때까지는 함께 살지도 않았다. 빨래나 요리는 물론 라면조차 끓일 수 없었고, 살림은 모두 영인의 몫이었다. 김 작가는 계동에서 글짓기 교실을 연다. 그곳에서 동네 문인들과 술판을 벌이고 주부 글짓기 모임을 열기도 한다. 그러한 와중에도 자기만의 글을 꾸준히 써갔다. 김 작가는 영인이 미국으로 향한 뒤, 뇌에 종양이 생겨 계동 글짓기 교실을 접고 병원으로 들어가게 되어도 글을 썼다. 정신이 멀쩡할 때는 계속해서 글을 썼고 어디를 가든 원고 파일을 끼고 다녔다. 병실에 있는 모든 환자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소설 내내 김 작가로 불리던 그녀는, 귀국한 영인이 병원에 오자 ‘엄마’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 영인은 김 작가를 정성껏 돌본다. 엄마가 김 작가로 돌아갈 수 있게, 그녀의 회복을 돕는다. 병원이 아니라 뉴욕이라는 환상을 심어주고, 네일 케어를 해주며 돈키호테를 읽어준다. 이러한 영인의 노력 덕에 김 작가의 상태는 매우 좋아진다. 의사도 설명하지 못했고, 영인 역시 뚜렷한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영인이 온 뒤로 환자가 아닌 ‘엄마’와 ‘김 작가’라는 호칭을 다시 얻었고, 그 이름이 다시 살아가게끔 만든 것 아닐까 싶다.


“미쳤던 사람이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오면 죽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돈키호테도 미쳤고 김 작가도 미쳤지만 김 작가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김 작가는 너무나 글이 쓰고 싶어서 죽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어느 면으로 보나 김 작가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


퇴원을 한 김 작가에게 뜻밖의 선물이 찾아온다. 문예 공모에 소설이 당선된 것이다. 장례식 때 쓰려던 노래는 당선 축하 겸 계동 라이팅 클럽 시작 파티에 울려 퍼진다. 살아가기 위해 글을 썼고, 글을 쓰기 위해 살아갔던 김 작가는 그녀의 꿈이었던 ‘김 작가’가 되어 삶을 마무리 짓는다.


소설은 현실을 담아내는 거울이다. 소설 속엔 ‘엄마’라는 새로운 이름 탓에 자신의 진짜 이름을 잃은 이도, 꿈을 잃은 이도 있었고 자신의 꿈을 지키기 위해 ‘엄마’라는 이름을 지웠다는 이유로 손가락질받은 이들도 있었다. 원영과 시선, 김 작가. 이들의 형태는 우리가 현실에서 너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엄마’들이기도 하다. 현실은 소설보다 더 잔혹하다. 경력 단절, 돌봄 노동, 임금 차별, 육아 휴직 등은 마치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인 것 마냥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가정 내의 돌봄 노동은 자신의 꿈을 지운 채 ‘엄마’가 된 이들에게 모두 전가되고, ‘엄마’가 된 후 다시 자신의 꿈을 찾아가려 하는 이들에겐 경력 단절과 임금 차별이 기다리고 있다. 원영이 겪은 아픔은 큰 문제이고 심시선의 행보는 손가락질받을 일이 아니며, 김 작가는 김 작가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엄마’라는 이름 아래 그들의 이름과 꿈이 가려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 여전히 현실은 소설보다 팍팍할 것이기에, 이름을 잃은 채 살아가는 ‘엄마’들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들이 원영과 시선, 김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길. 지워진 이름을 찾아 나갈 힘을 얻길. 소설보다 더 나은 현실을 마주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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