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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Jun 30. 2022

평범함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

6月 : 꿈을 넘어서며


체리필터의 ‘happy day’라는 노래에는 이러한 가사가 반복된다. “찬란하게 빛나던 내 모습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어느 별로 / 작은 일에도 날 설레게 했던 내 안의 그 무언가는 어느 별에 묻혔나” 


어린 시절 나의 원대한 꿈들은 어느 별로 날아갔을까. 얼마 전 문득, 나는 큰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무너질 만큼의 실패를 겪어본 적이 없기에 앞으로 벌어질 큰 실패들이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꿈과 현실 사이, 지극히 평범함으로 뒤덮인 하루를 살고 있기에 그런 걸까. 분명 어릴 적부터 나는 큰 꿈을 품은 채 살아왔는데, 이젠 쳇바퀴 굴리듯 그저 그런 하루를 반복하고 있다. 그저 그런 나날들처럼 꿈과 현실의 경계엔 평범함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벗어나 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선 그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가장 보통의 존재, 스스로가 평범하다고 인정하기까지 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꿈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포기한 채 돌아설 수 있는 용기, 내가 가진 한계를 수용할 수 있는 용기, 그저 그런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꿈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도 좋지만, 때론 나와 같은 고민을 지닌 채 비슷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더 와닿을 때도 있다. 지금 내가 그렇다. 꿈을 넘어서지 못 한 이들의 이야기, 자신이 처한 현실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던 이들의 이야기. 평범함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답을 찾아 가보고 싶다. 


「쇼코의 미소」 속 소유의 이야기 


「쇼코의 미소」의 주인공 소유는 영화감독을 꿈꿔온 여성이다. 영문과를 졸업한 후 영화 아카데미에 등록해 시나리오를 공부하고, 영화를 찍으면서 영화감독이 되리라는 꿈을 의심치 않았다. 자신의 대학 동기들이 저마다의 꿈을 이룰 때에도 소유는 그저 그들이 돈과 안정만 좇고 있다고, 그런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오만한 마음가짐을 지닌 채 타인을 비웃었고,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꿈은 죄였다. 아니, 그건 꿈도 아니었다. 영화 일이 꿈이었다면, 그래서 내가 꿈을 좇았다면 나는 적어도 어느 부분에서는 보람을 느끼고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지 감독이 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 나 자신도 설득할 수 없는 영화에 타인의 마음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건 착각이었다.”


서른을 앞둔 소유는 오 년간 시나리오를 썼고, 작은 영화에 스태프로 참여하며 영화 경력을 쌓아왔다. 그러나 영화 일보다는 가십을 듣고 퍼트리는 것을 더 잘했다.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가진 후로 눈만 점점 높아졌고, 현실에서 아등바등 살기 바빴다. 그럴수록 꿈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소유는 열등감과 오만함에 휩싸인 채 자신을 잃어갔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 역시 잃은 지 오래였다. 그저 영화판에서 비중 있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그뿐이었다. 허황된 꿈은 그녀의 삶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잃었고, 자신을 찾는 이들과도 거리를 두며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영화를 통해 내면의 깊은 곳을 그려낼 수 있을 거라 믿고 타협하기 바빴다. 자기 합리화와 오만함에 점철된 현실을 살아갔다. 이러한 행위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인지하지도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틀니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서울 자취방으로 오셨던 날 있잖아.’ ‘응.’ ‘그때 나한테 뭐라고 하셨는 줄 알아?’ ‘뭐라 하셨어?’ ‘내가 이러고 사는 게 멋지다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거니까 멋지다고 하셨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 영화 일이 마음으로 정리가 되더라.’”


소유가 영화를 찍겠다는 꿈에 눈이 먼 채로 의미 없는 하루들을 보낼 무렵, 소유의 할아버지는 이년 째 통원치료를 받고 있었다. 늘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당연시 여겼던 할아버지는 영면하셨다. 그제야 소유는 자신을 가로막던 꿈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서른이 된 소유에게 남은 건 인문대학 학부 졸업장과 단편 영화 두 편뿐이었다. 토플 책을 펼쳐 다시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채용 사이트에 매일 들어가 취직자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영화라는 꿈은 고이 접어둔 채. 


“할아버지는 아무런 평도 내리지 않고 그저 내게 묻기만 했다. 그런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은 건지, 정말로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있는지, 심지어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쥐로 변할 수 있는 건지, 그 소녀를 잡아낸 카메라는 누구의 시선인지 묻기도 했다. 그 불편하고 듣기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나는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애썼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나의 유일한 관객이었다.”


소유는 할아버지의 죽음 후, 쇼코를 다시금 만나게 된다. 쇼코의 목소리로 할아버지의 편지를 읽어가고, 쇼코와의 대화 속에서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기게 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유일한 관객이 되어준 할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한다. 특별한 존재가 되지 못한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준 할아버지의 진심을 알게 된다. 다만 소유를 구원한 것에 할아버지의 사랑만이 존재한 것은 아니다. 쇼코를 통해 듣게 된 할아버지의 편지와 죽음 후에 그와 나눈 대화를 곱씹어본 것이 소유의 깨달음의 계기가 되었을 진 몰라도, 자기혐오와 좌절을 극복한 채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은 어찌 되었든 소유 안에 존재했을 것이다. 오만함과 열등감으로 점철된 과거를 껴안은 것도 결국 소유가 용기를 낸 것이기에. 


소유의 기억 속에 전개된 「쇼코의 미소」는 소유의 현재를 뚜렷하게 보여주지 않은 채 마무리가 된다. 소유의 이야기를 온전히 듣지 못한 결말은 우리가 그녀의 앞날을 그려보게끔 만들어준다. 자신이 무의미하다고 여겨온 평범한 직장에 취직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고, 자신만의 이야기가 녹아져 있는 영화를 완성했을 수도 있다. 각기 다른 이들이 만들어갈 소유의 꿈은 어쩌면 각자의 마음이 투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소유의 이야기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 이들이 자신에게 하지 못 한 말을 전하고 있진 않을까. 몇 년간 키워온 꿈을 접은 소유가 다시는 무너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나, 다시 자신의 꿈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처럼 말이다.  





「서른」 속 수인의 이야기


「서른」 속 수인의 이야기는 서른이 된 수인이 성화 언니에게 쓴 편지를 통해 전개된다. 20대 초반, 노량진의 사임당 독서실에서 처음 만난 언니에게 써 내려가는 편지에는 수인의 20대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임당 독서실에서 꿈을 짊어졌던 수인은 불문과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내내 여느 대학생처럼 부모님에게 무언가를 입증하려고 애쓰며 성적 장학금을 받아내기도 했다.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하느라 여러 번 휴학을 반복해 7년 만에 졸업을 하게 된다.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 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 해 초조하네요.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 갔겠죠?”


그렇게 졸업을 한 수인을 기다리는 건 막막함뿐이었다. 사회초년생인 수인에겐 천만 원가량의 학자금 대출이 쌓여 있었고, 취직이 되면 갚을 수 있을 거라 낙관했지만 일자리를 얻는 과정이 쉽진 않았다. 거기에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집안이 휘청거리게 된다. 원래도 여유가 없는 집이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폭삭 주저앉는다. 그때 수인은 헤어진 지 3년 된 남자 친구의 연락을 받게 된다.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오십 대 남성의 강의를 들었어요. 너무 빤해서 들을 게 없는 강연 같죠? 맞아요, 언니. 그런데 그 빤한 게 사람 맘을 막 쥐고 흔들데요? ‘꿈’이라는 말을 듣는데 가슴 한쪽이 싸한 게 찌르르 아픈 것도 같고 좋은 것도 같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어요. 그리고 실은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말을 간절히 듣고 싶어 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어요. 말 그대로 ‘교과서에 나오는 말’ 같은 거. 올바르고 아름다운데. 실은 아무도 믿지 않는 말들 말이에요.”


다시 만난 전 남자 친구는 혈색이 매우 좋아 보였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삼십 대 초반의 신용불량자였던 모습은 없었다. 돈도 잘 번다며 자신의 회사를 소개해주기까지 한다. 처음의 수인은 자신의 이성과 논리를 믿으며 넘어가진 않았지만, 결국 다단계 회사에 들어가게 된다. 수인을 다단계 회사로 들어가게 만든 건 전 남자 친구의 변화도, 수인을 괴롭히던 현실도 아니었다. 뻔하디 뻔한 ‘꿈’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지 않을까. 절망의 문턱에서 아주 작은 희망을 마주하게 되었으므로.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단 생각이 들었지만 인정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거기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을 그냥 저도 따르고 싶었거든요.”


휴대전화를 압수당한 후 합숙소에 들어간 수인에게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다 큰 청년들이 한 방에서 지내는 곳에서 형편없이 살아가며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는다. 5백만 원어치의 양파즙을 물 대신 마셔가며 그동안 알고 지낸 이들의 이름을 지워갔다. 두셋씩 짝을 지어 생활하며 생필품을 팔고, 건강식품을 팔고, 사치품을 팔았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사람을 팔며 삶을 이어나갔다.


“세상은 앞으로 더 추워지겠죠?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수인은 다단계 회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학원 강사로 일할 적 자신을 유난히 따르던 제자인 혜미를 자신의 자리에 넣었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여고생으로 남아있는 혜미에게 이런 일을 시켜도 될까라고 고민을 하기가 무섭게 상급자는 지시를 내렸다. 수인은 형식적인 반가움을 표하며 혜미를 만났고, 기계처럼 대사를 줄줄 뱉으며 영업을 한다. ‘샘 저 좀 꺼내 주세요’라는 문자를 남긴 혜미는 자살을 시도하고 식물인간이 된 채 병실에 계속 누워있다. 


‘어찌해야 하나’ 수인은 스스로에게 똑같은 질문만을 반복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주변에 남은 사람도 없어 물어볼 수도 없다. 수인은 언니에게 편지를 쓰며 스스로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꿈과 일말의 도덕성조차 버린 채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을 때와는 달리, 수인은 처절한 목소리로 답을 찾아 헤맨다.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진심 어린 반성을 담아 편지를 쓴다. 언니가 편지를 읽고 있다면 혜미가 있는 병원에 찾아갔다는 뜻일 거라는 말과 함께 수인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삶을 갉아먹던 수인은 부끄러운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갔고, 이를 언니에게 전했다. 수인의 고해성사의 청자는 곧 수인 자신이기도 하다. 언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곧 스스로에게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해당한다.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소유와 수인의 이야기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허영심과 오만함에 가득 찬 소유의 꿈, 점점 현실에 맞춰 목표를 낮추면서도 꿈 이야기에 두근거리던 수인의 모습. 이번 학기를 마무리하며 지쳤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누구보다 높은 잣대로 나를 폄하하고 갉아먹던 내가, 이젠 스스로에게 한계를 긋고 목표를 낮추고 있었다. 추진력과 경험이 내 장점이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은 시작하기 전부터 스스로에게 합리화하는 과정을 반복하기도 했다. 디자인이 배우고 싶어 의류학과 수업을 듣기 시작했으면서, 전공생만큼 노력하지도 않는다. 나도 본 전공이었으면 쟤들처럼 했을 거라는 오만함과 자기 합리화로 점철된 하루들을 보내며 학기를 낭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올 때만 해도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던” 수인처럼, 나 역시 세상을 바꾸는 광고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진 채 대학에 들어왔지만 점점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다. 내가 창의력이 넘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고 스스로 할 일을 잘 찾아갈 뿐. 딱 그 정도의 존재라고 느끼기도 했다.


누군가는 소유와 수인의 이야기에서 죄책감이 전이되는 경험을 할 것이고, 처절함과 현실감에 눈을 찌푸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이 가진 한계를 품은 채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성장의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 년 간 품은 꿈을 접고 다른 길을 찾아간 소유의 대범함과 자신의 실수로 식물인간이 된 제자에 대한 경험을 털어놓는 수인의 솔직함이 내겐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특별함을 꿈꿔온 소유와 수인은 결국 자기 자신의 평범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소유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접은 뒤,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그토록 싫어했던 제도권 교육을 받아들이고 영어단어를 외우며 채용사이트를 들여다본다. 살아가기 위해 삶을 잃었던 수인은 언니에게 편지를 보내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반성하는 길고 긴 자기 고백의 과정을 거친다. 그들은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마주 볼 수 있게 된다. 평범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는 곧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by. 선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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