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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Jun 30. 2022

꿈의 필멸자들

6月 : 꿈을 넘어서며

  김성중의 『국경시장』에 수록된 단편소설 「필멸」은 음악가로서의 성공이라는 꿈을 가진 앙투안과 그의 음악원 학우 세 명, 그리고 학장의 치열한 사투를 그리고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음악과 음악을 통한 성공에 대해 강한 열정과 집념을 지녔다. 그중, 주인공 앙투안은 아버지가 건강과 재정에서의 파산을 선고받은 불우한 가정환경에 놓여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건초염을 앓고 있으며 연주자로서 자신의 학우 비투스보다 재능이 뛰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작곡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는 인물이다. 부유한 학우들과는 다르게, 가난한 재정 상황에 처해 있으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부단히 노력하는 앙투안의 기저에는 성공에 대한, 강박에 가까울 정도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음악원이라는 환경 속에서 치열하게 펼쳐지는 경쟁 무대, 그리고 어떻게든 성공해야만 한다는 욕망으로 인해 앙투안은 불안과 자만이라는 극단의 이중주 속에서 내내 허우적거리고 있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이를 입증한다.     

  촌구석에서 대도시로 옮겨 심어지는 동안 앙투안은 여러 종류의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언젠가 자신의 음악이 전 유럽에 울려 퍼지리라는 꿈을 품고 있지만 덩치 큰 더블베이스 주자와 싸울 때처럼 점점 더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앙투안은 누구보다 속주에 능했고 초견만으로도 선배들의 연주를 능가했다. 그리고 이런 재능 때문에 더더욱 고립되었다. 경쟁과 무대 공포증 속에서 성장한 음악원 학생이라면 누구도 재능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유명해질 거야. 내게는 스타성이 있으니 대단한 곡을 선보이기만 하면 돼. 상금과 로마 유학, 그리고 명성을 한꺼번에 움켜쥘 오스카르 콩쿠르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가.     


  뱅상과 비투스, 제프리와 함께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 앙투안은 꿈속에서 들려왔던 음악을 악보에 옮겨 적으며 이 노래에 <불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잉투안은 이 노래가 자신에게 불멸을 가져다줄 거라는 강한 확신에 사로잡혀 학장에게 콩쿠르에 낼 작품으로 <불멸>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후부터 비극은 시작되었다. 뱅상이 <불멸>과 아주 유사한,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누가 봐도 한 사람의 곡이라고 생각할 만한 노래 <로린의 어깨>를 완성한 것이었다. 곡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지 혼란에 빠진 앙투안은 새로 노래를 쓰려고 했지만, <불멸>과 유사한 조악한 모사품을 완성하고 난 이후,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곡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리고 뱅상의 목을 피아노 줄로 칭칭 감아 죽이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꿈에 대한 강력한 욕망과 집념이 도리어 꿈을 향해 달려가는 한 영혼을 붉게 물들이고 만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는다. 마치 꿈의 달성이라는 불멸에 도달할 수 없다는 듯이. 또 다른 학우 비투스가 살해당했으며, 비투스가 제출한 <평화를 주소서>라는 노래 또한 <불멸>과 똑같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학장은 앙투안을 비투스를 살해한 범인으로 기정 사실화한 채 추궁했다. 앙투안은 자기 자신이 비투스를 살인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뱅상을 살해했다는 것을 밝혀야 하는 딜레마에 처하게 되고 만다. 앙투안은 학장이 자기 자신을 범인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학장 또한 곡을 탐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떠올리며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학장을 죽인 것이다. 비투스와 학장이 모두 죽고 나자, 행방이 묘연해진, 실제로는 앙투안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뱅상이 강력한 용의자로서 대두되었고 음악원은 혼란에 빠진다. 남은 것은 제프리와 앙투안뿐이었고, 앙투안 또한 흉기를 든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으나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결국 <불멸>을 차지하고자 한 사람, 비투스를 죽인 사람이 제프리라는 것이 밝혀지며 둘은 최후의 사투를 벌이게 된다.      

 

 그렇다. 진실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물리력뿐이었다. 범속한 인간 사이의 경쟁이 대개 그렇듯. 앙투안은 결투의 승리자가 <불멸>의 주인이 된다는 결말이 새삼 서글펐다.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곡을 던져놓고 이전투구를 지켜본 끝에 가장 악한 자에게 트로피를 주다니. <불멸>은 신이 아닌 악마에게서 흘러나온 것임이 틀림없었다.   

  

  피로 얼룩진 결투의 승자가 <불멸>이라는 아름다운 곡을 손아귀에 넣는다는 사실이 서글퍼질 만큼 이 음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결국 음악과 음악으로 인한 성공이라는 꿈을 달성하기 위한 인물들의 사투는 비극에 다다르게 된다. 앙투안과 제프리는 서로의 몸이 피로 물들 만큼 치열하게 싸웠으며 제프리는 숨을 거두고 앙투안은 치명상을 입게 된다. 홀로 남은 그 순간, 앙투안은 비릿한 피 냄새와 온기 너머로 <불멸>을 들으며 최후의 황홀을 감각한다. 그리고 이내 죽음을 맞이하고, <불멸>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누구도 <불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으며, 꿈에 대한 열정과 의지, 집념은 피 냄새로 범벅이 된 채 그들의 숨과 함께 휘발되고 말았다. 

  누구에게나 꿈은 환상적이고 황홀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꿈이 아름다움을 지니기 위해서는 오롯이 성취되어야만 한다. 꿈으로 가는 여로는 다양하고, 꿈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이를 이루기 위해 자신만의 여정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꿈으로 향하는 길은 순탄치 않다. 그것이 순탄했다면 꿈에 부여된 환상성과 아름다움은 소거되었을 것이다. 모두가 꿈을 달성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 그리고 마침내 꿈을 거머쥐었을 때의 찬란한 황홀에 대해서 집중할 때, 한편으로 꿈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욕망의 불길을 잠재했는지를 김성중의 「필멸」이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꿈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올라 광기가 되었을 때, 어떤 비극과 파멸이 도사리는지를 텍스트의 서스펜스식 극단적 서사가 첨예하게 그려 주었다. 같은 단편집에 속한 「쿠몬」에서도 자신의 꿈을 충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재능으로 인해 질투와 열등감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처럼 모두가 꿈을 달성하고자 하더라도 꿈으로 가는 길목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고, 이에 걸려 넘어져 영영 꿈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놓여 있다. 자신의 꿈을 불멸하는 성취로 환원한 소수의 사람들이 아닌, 필멸하는 꿈, 정확히 말하면 꿈으로 인해 필멸한 자들의 모습에 귀 기울이고 싶었다. 타인을 시기하거나 질투하고, 자신의 재능과 꿈의 실현 가능서에 대해 불안해하고, 어떻게든 꿈을 실현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괴로워하는 모습. 꿈을 넘어선 이면에 존재하는 필멸자들의 포즈가 나에게 깊숙이 와닿았다.

  「필멸」의 주인공 앙투안을 경유하여 재능에 대한 강박과 열등감에 내내 시달렸던 고등학생 때의 내 모습을 돌아본다. 언제나 전공 실기 평가의 성적과 등수, 교내외 대회에서의 수상 실적에 매달렸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때마다 알게 되는 전공 실기 점수와 등수에 목을 맸다. 나는 기복이 심한 편이었으므로 10명 중 1등과 3등을 오고 간 적이 많았다. 만족할 수 없었다. 1등이라는 성적을 거머쥐면 찰나의 기쁨은 섬광처럼 사라지고 이 성적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강박감이 나를 휘감았다. 3등을 받았을 때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내 작품의 수준과 재능에 대해 늘 고민하고 천착했다. 특히나 나는 교내 수상 실적은 준수한 편이었으나, 교외 대회에서는 좋은 성과를 거둔 적이 많지 않았기에 내 시에 대한 의구심과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던 준수한 재능을 향한 열망은 갈수록 커져갔다. 외줄타기를 하듯이 자만과 열등을 오갔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간 순간, 처음으로 치렀던 모의 실기에서 난생처음 받아 보는 등수를 보고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리고 나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둔 친구들의 재능을 시기하고 질투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이야기를 상기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살리에르의 편에 서서 괴로워했다. 훌륭한 성적을 받아 든 친구들에게 열등감이 기원이 되는 살의를 느낀 적이 빈번했다. 내가 과연 글을 쓸 만한 재능을 지니고 있는지 수없이 되물었다. 타인에게 물음을 던졌을 때 돌아오는 답은 일정했으나,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결국 그동안 써 왔던 모든 작품들을 몰아넣고 펜을 놓고 말았다. 글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시작된 꿈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앙투안이 연주자에서 작곡가로서의 변모를 꿈꿨듯이, 나 또한 시 창작에서 비평으로의 전환을 마음먹기도 했다. 내가 유일하게 늘 정상을 유지했던 것이 비평이었으므로. 언제나 비평과 평론에서 좋은 성과를 얻었으며, 이에 대한 호기심이 없진 않았던 것도 아니었으나 내키지 않았다. 나는 시를 쓰고 싶었다. 섬세한 직물을 조직하듯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설계하듯이 나의 언어를 한 편의 시로 구축하고 싶었다. 현실적으로는 시 창작에 대한 나의 재능은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비평과 평론에 대한 꿈을 가지는 것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를 마음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다. 늘 시 창작에 매달렸으며, 나에게 훌륭한 시를 축조할 만한 재능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괴로워했다. 정신적 번민과 고통은 신체적인 영역까지 확장되었다. 시를 보면 한 글자도 읽히지 않았고, 울렁거리다 못해 발작이 찾아왔다. 도저히 시를 읽고 쓸 수 없어서 전공 실기실을 뛰쳐나간 적도 있었다. 나를 이끌어 나가던 시가 도리어 나를 좀먹었다. 불멸하는 언어를 그려내고 싶다는 간절한 꿈이 나를 필멸로 이끌었다. 굳게 걸어 잠근 마음의 문을 열어젖혀 해방의 몸으로 만들어 주던 언어가 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때, 꿈이 나의 필멸을 가리키는 이정표임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재능에 대한 강박과 열등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동전의 양면처럼 열등감의 뒤편에 자리 잡은 자만감에서도. 언제나 성적과 성과라는 목적이 나를 불멸로 이끄는지, 필멸로 이끄는지 그 방향을 짐작할 수 없었다. 목을 조르는 듯한 압박감과 한편으로는 만족할 만한 성과에서 오는 성취감, 이 양극단에서 허우적거린다. 마치 숨이 막힐 만큼 물에 잠겼다가도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신선한 숨을 들이마시듯이. 이 가파른 유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내가 언제 앙투안처럼 필멸에 다다를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꿈은 필멸로 이끄는 파괴적인 속성이 있다는 것을, 꿈이 언제나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속성만을 함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몸소 말하고 싶었다.




by. 돌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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