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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Jul 29. 2022

꿈으로부터 남겨진 것

7月 꿈으로부터

꿈보다 얄궂은 단어는 없다. 작은 목표 앞에 꿈이라는 단어를 붙이기만 해도 거창한 모습이 된다. 누군가에게 꿈을 이야기하면, 응원 혹은 평가가 뒤따라오기도 한다. 꿈이 없다고 하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조언을 퍼붓는다. 꿈을 이루고 난 뒤에도 또 다른 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끝이 없다. 특히 꿈을 이루지 못 한 이들에게는 실패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꿈으로부터 시작되어 그것을 이루거나, 또 좌절되며 꿈으로부터 멀어지곤 한다. 그 과정 속에 남겨진 것이 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남겨진 것의 형태도 다양하다. 누군가는 경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누군가는 실패라는 이름을 붙인다. 또 다른 꿈을 위한 발판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꿈을 포기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꿈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주목해야 할 것은 꿈이 아니라 남겨진 무언가일 수도 있지 않을까.


「침묵의 미래」 속 꿈으로부터 남겨진 것  

「침묵의 미래」는 말과 화자의 이별을 그린 이야기이다. 말의 영혼이 주인공이다. 소설은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언어를 구사하는 마지막 화자들이 모인 ‘소수언어박물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라져 가는 언어를 보존하고 연구한다는 취지로 설립된 공간에서, 화자들은 모두 같은 꿈을 꾼다.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화자를 만나는 것이다.


“그는 아흔 두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꼭 할 말이 있다는 듯 허공에 가쁜 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알아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의 유일한 화자이자 청자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과 헤어지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말과 잘 사귄 것도 아니었다.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자기 삶의 대부분을 온통 말을 그리워하는 데 썼다.”


주인공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언어로 이야기하다 하나뿐인 죽음을 맞이한 이를 떠났다. 그는 후두암에 걸린 노인으로, 그의 목울대에 있는 작고 둥근 기관이 주인공의 마지막 집이었다. 노인의 꿈은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이가 곁에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너무 평범하고 친근해 눈물이 날 것 같은’ 모국어로 대꾸해주길 바라 왔다. 상대가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도 괜찮을 것 같으니, 자기 말을 알아듣는 누군가가 곁에 있길 바랐다. 그러나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유일한 화자이자 청자가 바로 자신이었기에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뱉고 눈을 감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것은 주인공의 이름, 즉 말의 이름이었다. 삶의 대부분을 써가며 그리워했던 이름을 부르며 죽음을 맞이했다.


“어떤 이는 죽는 날까지 상황이 바뀔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기적처럼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자기네 부족말로 아침 인사를 건네주기를. 연민도, 경멸도, 호기심도 없는 얼굴로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들을 늘어놔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곳 화자들은 중이염이나 관절염, 치매, 백내장 외에도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간다. 그건 말을 향한, 말에 대한 지독한 향수병이다. 이들은 과거에 들었다면 절대 흔들리지 않았을, 몇몇 밋밋하고 순한 단어 앞에서 휘청거렸다. 그래서 누군가는 자기네 나라말로 무심코 ‘천도복숭아’라고 말하며 울고, 어떤 이는 ‘종려나무’라고 한 뒤 가슴이 미어지는 걸 느꼈다. 뜬금없이 떠오른 ‘곤지곤지’라는 단어에 목울대가 뜨거워진 이가 있는가 하면, ‘연두’ 또는 ‘뽀뽀’라는 낱말 앞에서 심호흡 한 이도 있었다.”


대화를 할 수도 없고, 나의 말을 알아듣는 이도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화자들은 향수병을 키워갔다. 고독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시간에서 자라난 향수병. 자신의 부족말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꿈에서 멀어진 채 남겨진 것은 지독한 향수병뿐이었다.


「새야새야」 속 꿈으로부터 남겨진 것

「새야 새야」에는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큰놈, 들을 수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작은놈이 등장한다. 작은놈이 어머니의 꿈이었던 글을 배우며, 이들 사이엔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땐 웅덩이같이 아늑했던 집이었다. 그들이 집 안팎의 허공에 대고 그린 손짓 말그림은 거미줄처럼 포개져 떠다녔다. 소리가 없어 달팽이집같이 조용했지만 저 집에 셋이 살 땐 그들은 서로 시끄러워서 눈을 질끈 감곤 했었다. 문이 닫히거나 밥수저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소리 마저 끊길 때가 그들에겐 가장 시끄러운 때였다.”


글을 배우기 전까지, 이들의 집은 웅덩이같이 아늑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달팽이집같이 조용한 곳이지만, 이들에겐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허공에 대고 손짓 말그림을 그리며 대화를 나눴기에 문이 닫힐 때나 밥수저를 들 때가 가장 조용한 순간이었다.


“나씨가 그린 글씨들은 미로였다. 어머니와 셋이 허공에 그린 손짓처럼 투명하질 않았다. ㄱ과 ㅏ를 합치면 가이면서 ㅗ랑 섞이면 고라니. 저희들끼리만 미로인 게 아니라 셋의 마음을 어지럽게 갈래지게 했다. 그들이 바람 속에 햇살 속에 그렸던 손그림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섞갈림이 ㄱ과 ㄴ 사이엔 있었다.”


“결국 ㄱ과 ㄴ은 똑같았던 그들 셋을 달라지게 해 놓았다. 어머니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되었고 큰놈은 읽을 줄만 아는 사람이 되었다. 오로지 그것 하나를 남겨주려고 살아왔던 것 마냥 작은놈이 쓰고 읽는 것을 예사로 하게 되자 어머닌 자리에 누웠다.”


글을 몰랐던 어머니는 형제가 글을 쓰고 읽을 수 있길 바랐다. 어머니의 부탁을 받은 나씨는 형제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다. 손그림으로 이어가던 의사소통에는 단절이 생겼고, 작은놈에게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꿈을 위해, 그녀가 덜 슬퍼하길 바라며 작은놈은 열심히 글을 배웠다. 갈라진 틈의 골이 깊어지는 걸 알면서도.


“밤하늘의 구름은 얼어붙었는데 달빛은 담장에서 은근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번 세상의 공기 속에 섞어놓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저 집의 한 시절에게 주고 가고 싶다. 어머니와 큰놈과 셋이서 살던 그 시절에게로”


읽고 쓸 수 있길 바랐던 어머니의 꿈은 그들의 관계를 파멸로 이끈다. 글을 배운 작은놈은 펜팔로 사랑을 키워갔으나 자신의 장애로 좌절이 되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그런 작은놈에게 큰놈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아내에게 보낼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돌아온 그녀는 돈이 든 가방을 가진 채 떠나고 만다. 큰놈은 그녀와 살던 집을 불태운 뒤 자살하게 된다. 작은놈은 사랑한다는 말을 세상의 공기와 섞어놓을 수 있다면 어머니와 큰놈 셋이 살던 시절에게 주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말을 할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은 이들을 막는 장벽이 아니었다. 꿈을 이루기 시작한 순간부터 분열과 외로움은 시작되고,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꿈을 꿀수록 꿈에서 멀어질 때의 좌절감은 겪어본 이들만 알 것이다. 꿈을 꾸지 않았으면 결과가 달랐을까. 글을 읽게 되며 생겨난 가족 사이의 틈과 더 이상 쓰이지 못한 채 남겨진 언어의 ‘영혼’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꿈으로부터 시작되어 꿈으로부터 멀어지며 남겨진 것들이 있다. 그것은 ‘그리움’일 수도 있고, ‘고독’일 수도 있으며, ‘파멸’일 수도 있다. 내게 남은 것들은 무엇일까.


옥돌 민(珉)에 상서로울 서(瑞)를 써 빛나는 보석이 되라고 지어주신 이름을 가지고 있다. ‘민서’라는 이름은 흔했지만, ‘빛나는 보석’이라는 의미는 나 하나일 거라는 생각에 내 이름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했다. 보석을 갈고닦아 빛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내가 가장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이뤄야 했다. 하고 싶은 게 많아 꿈을 이야기할 때는 그중에서 가장 빛나고 거창한 꿈을 꺼내곤 했다. 변호사부터 경찰, 아트디렉터, 삽화 디자이너, 애니메이터, 카피라이터, 광고기획자. 지금 생각나는 꿈만 나열해도 이 정도이다.


그런데 꿈을 꿀수록 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내 이름을 빛내려고 할수록 나를 점점 잃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미술을 그만두게 되었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광고홍보학과에 떨어지고 말았다. 동생이 운동을 시작하며 선뜻 미술 학원을 보내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예고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동생만으로도 힘들어할 엄마와 아빠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미안했다. 미술을 하기보다는 공부 더 열심히 해서 대학 가서 배우겠다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미술이 지겨워서, 못 해서, 하기 싫어져서가 아니라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 미술에 대한 꿈을 접은 뒤, 삼 년 내내 광고만 바라보고 꿈을 키워갔다. 광고홍보학과는 전부 떨어졌다. 지금 보면 성적이 낮거나 더 뛰어난 학생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땐 아니었다. 광고라는 꿈을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첫 단추를 잘못 낀 채 고등학교를 다닌 느낌이 들었고, 내 노력이 완전히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내게 꿈으로부터 멀어지며 남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좌절감이나 실패를 뽑고 싶진 않았다. 꿈이 많았던 만큼, 이것저것 해보고 그만둔 게 많다 보니, ‘얕고 넓게 아는 것’이 내 장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미대생들만큼은 아니지만 원하는 것을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 광고인만큼은 아니지만, 통통 튀는 날 것 그대로의 아이디어를 모아 광고 공모전에도 여러 번 도전해봤다. 영화에 대해 배운 적은 없지만 매년 영화제 도장 깨기를 하고, 내 마음대로 평가하며 취향에 맞는 영화를 찾아가고 있다. 전문성은 없을지언정 얕고 넓게 알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나만의 방식이 남았다.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내게 찾아오지 않았을 것들이다. 어쩌면 꿈보다 더 소중하기도 하다.


꿈으로부터 멀어진 뒤, 내게 남은 것들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 아닌 세상을 빛내는 보석이 되기로 결심했다. 엄청난 꿈을 이뤄야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났고, 성공과 실패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콘텐츠를 만드는 직업인이 되고 싶다는 애매한 목표만을 남겨두었다. 언제든 수정할 수 있고,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도록.


by. 선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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