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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Apr 13. 2023

'낭만'이 주는 힘

3月, 유지혜의 『쉬운 천국』을 읽고

'낭만'이 주는 힘

- 유지혜 <쉬운 천국>을 읽고


 20대란 무엇일까. 확 트인 가능성 앞에 발을 디디면서도 동시에 그동안 쌓아온 익숙한 것들이 무너지는 시기 아닐까. 배우고 싶은 것을 진득하게 배울 수 있고, 관심 있는 분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과 만나고 소통한다. 그러나 앞으로의 예정된 미래를 두려워하며 여전히 어딘가 급급하다. 어서 진로를 정해 가고 싶은 기업을 정하고, 그 기업에 취직하기 위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사회의 통념 아래서 학년의 숫자가 올라갈수록, 나이의 자릿수가 올라갈수록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다. 공부하기 위해 간 학교는, ‘그 학교까지 갔는데 이왕이면...’이라는 말로 다시 시작점이 된다. 동분서주하게 나에게 맞는 직장을 찾아다닌다. 문제는 그사이에 좋아했던 것들과 학교를 진학한 이유 같은 것들은 희미해지고 종국엔 쓸데없는 낭만으로 모서리에 짱박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휴학했다. 기존의 세상이 깨어지고 큰 세상이 범람하는 20대라는 파도를 타지 못하고 풍덩 빠져 휩쓸리는 꼴이었다. ‘쓸데없는 낭만’이 없으니 나는 나로서 존재하지 못했다. 내가 나로 존재하지 못하니 쉽게 남이 되려고 했다. 나는 잠시 멈춰서 고요한 내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었다. 그때 읽게 된 책이 유지혜의 쉬운 천국이다.


  이 책은 여행 에세이로 분류된다. 그러나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여행의 낭만이 아니다. 유지혜는 줄곧 얘기한다. 무엇을? 사랑을. 베를린, 뉴욕, 런던, 파리... 이런 타국들은 환상성을 부여하곤 하지만,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여행이 주는 설렘이라든지 타국의 문화가 아니다. 작가는 끊임없이 타인과 관계 맺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베를린의 소라, 런던의 지현, 그리고 스쳐 지나간 많은 인연. 유지혜는 그들과 주고받은 애정 어린 시간을 따뜻하게 풀어낸다. 낯선 공간이라는 특수성은 서로에게 더욱 집중하게 한다. 재미있게도 그 기록들은 나한테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기억이다. 서로가 너무 가까워 서로를 소속하고 애정했던 10대, 그러니까 더 좁은 사회망 속에 속해있을 시절, 타인과의 관계 맺음을 떠올리게 한다. 먼 기억을 소환한다. 하교 후 독서실에서 친구들과 킬킬거리던 것, 하드를 물고 늘어져 먼 미래에 대한 고민을 나누던 것, 운동장을 돌면서 나눈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아득한 노을 볕이 스민 듯한 이야기들은 20대 이전의 시절, 그러니까 더 커다란 가능성과 책임감, 미래에 대한 막연함 이전의 시절을 호출한다. 그리고 그 과거의 기억들은 잃어버린 낭만을 재생산한다. 그 낭만은 거창하지 않다. 성취나 잘 맺음된 마무리에서 오지 않는다. 사소한 일상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분홍색 노을, 자전거 타다 넘어지며 발견한 코스모스, 살보다 비계가 더 많은 양꼬치, 바람에 흔들리는 벽에 붙은 노란 메모지들. 그러다 보면 여기까지 생각이 뻗는다. 나를 나로서 존재하고 행동하게끔 하는 낭만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잖아? 책도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일상의 소중함, 그리고 자신 찾기.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면, 나는 졸업할 테고, 어쩌면 취업도 하게 될 테고,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더 큰 가능성과 책임감이 몰려오는 곳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전에 나는 나로서 존재해야 한다. 탄생부터 현재까지 나라는 사람을 끌고 왔던 끈끈하고 기다란 내가 만들고 선택해 온 ‘나’를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는 나를 한 번 잃어버렸었다. 그 ‘나’는 나의 10대와 20대라는 경계에서 놓쳐버렸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가 20대라는 어떠한 변화 앞에서 속수무책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힘을 준다. 낭만을 상기시키고, ‘나’를 기억하게 한다. 내 끈을 붙잡게 해 준다. 그래서 이 책은 ‘시작’과도 연관이 깊다.           



by. 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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