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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Apr 13. 2023

끝과 시작의 지대에서

3月,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을 읽고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시체로 가득 찬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누군가는 길가의 잔해들을

한옆으로 밀어내야 하리


누군가는 허우적대며 걸어가야 하리

소파의 스프링과

깨진 유리조각,

피 묻은 넝마 조각이 가득한

진흙과 잿더미를 헤치고


누군가는 벽을 지탱할

대들보를 운반하고,

창에 유리를 끼우고,

경첩에 문을 달아야 하리.


사진에 근사하게 나오려면

많은 세월이 요구되는 법

모든 카메라는 이미

또 다른 전쟁터로 떠나버렸건만


다리도 다시 놓고

역도 새로 지어야 하리

비록 닳아서 누더기가 될지언정

소매를 걷어붙이고,


빗자루를 손에 든 누군가가

과거를 회상하면,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누군가가

운 좋게도 멀쩡히 살아남은 머리를

열심히 끄덕인다

어느 틈에 주변에는

그 얘기를 지루히 여길 이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하고.


아직도 누군가는

가시덤불 아래를 파헤쳐서

해묵어 녹슨 논쟁거리를 끄집어내서는

쓰레기 더미로 가져간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리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그보다 더 알지 못하는,

결국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원인과 결과가 고루 덮인

이 풀밭 위에서

누군가는 자리 깔고 벌렁 드러누워

이삭을 입에 문 채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아야만 하리

-「끝과 시작」, 『끝과 시작』, 전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1996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시인이다. 세계적인 시인의 반열에 올랐기에 그녀에게 따라붙는 빛나는 수식은 많다. 언어의 장벽에 가로막힌 채 말의 어감과 어조가 주는 뉘앙스적인 아름다움이 걸러진 번역문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느낄 수 없지만, 쉼보르스카의 시구는 흡사 ‘할머니’의 어조와 같다고 한다. 아주 다정하게 옛날 이야기를 속삭이는 할머니의 어투가 시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한다. 실제로 쉼보르스카의 시편들을 살펴보면, 아주 어렵거나 현학적인 어휘가 나열되기보다는 간결하고 정제된 말들이 수놓아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가 결코 얄팍하지는 않다. 오히려 쉬운 문장으로 쓰여 있음에도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울림은 매우 깊다. 파편화된 이미지들과 자폐적인 언술들로 뒤섞인 현대 시에 지칠 때면 나는 다시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곤 한다.

  내가 쉼보르스카의 시를 처음 읽은 건 ‘시작(詩作)’할 무렵이었다. 정확한 시기를 추정하자면 고등학교 2학년 때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도 소설보다는 시를 줄곧 써 왔지만, 2학기에 들어서는 크게 슬럼프가 왔다. 내가 과연 시를 쓰는 것이 맞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소설과 시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전부였으므로 세부 전공을 ‘시’로 정했다. 결국 이전까지 써 왔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새로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그것 말고는 캄캄한 벽 앞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었으므로. 그리고 본격적인 전공 실기 수업을 시작할 때, 나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편들을 읽었다. 강제성이 부여된 읽기였으나 그것과는 무관하게 편안하면서도 깊이 있는 시들을 보고 감탄을 자아냈다. 특히나, 쉼보르스카의 걸출한 시편들 가운데서 ‘시작의 시작’을 결심한 나는 「끝과 시작」에 마음이 갔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는 반드시 끝이 수반되어야 한다. 서로 맞물리지 않는 ‘끝’과 ‘시작’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끝과 시작은 서로 상반되는 이분법적 개념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마치 끝이 나면 바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처럼. 그러나 쉼보르스카는 끝에서 시작으로 이어지는 그 틈에 주목한다. 끝에서 시작으로 가는 중간 지대에 머물며 ‘끝’의 잔해와 잠복하는 ‘시작’을 응시한다. 전쟁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정리하고 갈무리하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고, 그 자리를 “결국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넘겨 주어야 함을 예언적으로 읊조린다. 결국 “원인과 결과”가 모두 공존하는 “이 풀밭 위”에 우리가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쉼보르스카가 「끝과 시작」에서 이야기하는 ‘끝’과 ‘시작’은 거시적인 차원에 속한다. 보편적인 인류의 ‘끝’과 ‘시작’에 대한 사유를 응축하고 있다. 특히나, 시편 곳곳에서 발견되는 전쟁의 흔적들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전쟁이 지나간 자리,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그 폐허를 갈무리하고 다시 시작하는 인류의 모습. 그렇다면 “원인과 결과가 고루 덮인”, 이 “풀밭” 위에 놓인 개개인의 끝과 시작은 어떠할까. 한 개인이 밀고 나가는 행위의 끝과 시작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끝과 시작을 죽음과 탄생의 등가 관계로 설정한다면 어떻게 인식될까. 바로 쉼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에 나타나듯이, 죽음과 탄생이라는 거대한 끝과 시작 사이에 놓였다는 유한성 때문에 인간과 그 인간이 한 행위가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실습 없이 죽는다.


(…)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두 번은 없다」, 『끝과 시작』, 부분




  쉼보르스카는 “아무런 연습 없이” 생을 시작하고, “아무런 실습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은 사라지기에 아름답다고 말한다. 삶에서 단 한 번도 똑같은 것이 일어나지는 않기에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삶이 쳇바퀴 돌리듯 반복되고, 인간이 영원과 무한을 담보받은 존재라면 사실 ‘끝’과 ‘시작’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끝과 시작이라는 개념조차 실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유한하고 끝과 시작 속을 누비는 나에게 끝과 시작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끝을 지나고 있으며,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는가. 쉽게 규정하거나 단언할 수는 없다. 비록 3월이 태동의 계절이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무언가가 시작되고 끝난다는 것이 실체적으로 와닿지 않기에. 어쩌면 나는 시작(詩作)에만 골몰했던 지난날들을 갈무리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시를 쓰겠다는 파토스는 점점 사그라들고 있으니. 그러나 무언가가 끝나고 나면 시작하는 것이 뒤따를지도 모른다. 언제나 끝은 시작을 수반하고 있으며, 앞으로 펼쳐질 것들은 오로지 단 한 번만 일어날 것들이니까.



by. 돌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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