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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Jun 08. 2023

더울 때도 추울 때도

5月, 이슬아의 『날씨와 얼굴』을 읽고

  날씨는 인과의 성격을 가진다고 배웠다. 태양열로 수증기가 올라가 구름이 되고 그게 모이면 비가 온다. 기온이 떨어지면 비가 눈이 되어 내린다. 이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초등 수준 과학 상식에 의하면 우박, 태풍, 해일 그 외 우리가 알 법한 기후 현상은 모두 확실한 원인이 제공되고 그것이 예측할 수 있는 결과로 돌아와 나타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인과라는 것이 때론 불규칙을 넘어 불공평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한 에어컨 판매원의 일화가 떠올랐다. ‘바깥 날씨 모르고 사는 게 얼마나 낭만적이에요.’라는 말로 손님을 부추긴다고 했다. 기후와 환경의 인과는 가혹하다 느껴질 만큼 착실하게 위에서 아래로 향한다. 누군가는 날씨를 몸으로 느낀다. 그것은 특별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지금 공부 안 하면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곳에서 일한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 공부 안 하면’이라는 전제와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추울 때 추운 곳에서 일한다.’라는 결과 사이,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다. 날씨를 잊고 사는 자들은 바깥의 일도 잊어버린다. 대개는 그러하다. 더운 날 더운 곳의 더움을, 추운 날 추운 곳의 추움을 알지 못한다. 


우리 집으로도 오고 당신 집으로도 갈 택배 상자 수만 개를 그곳의 노동자들이 상차한다. 바로 그곳, 쿠팡 물류센터에 에어컨이 없다는 기사를 보고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여름철 물류센터의 평균 온도는 30도에서 35도까지 올라간다. 전국에 100개 가까이 되는 쿠팡 물류센터 중 에어컨이 설치된 작업장은 단 한 곳뿐이다. 4만 명 넘는 쿠팡 노동자들이 에어컨 없는 물류센터에서 일한다. 이 고통을 헤아릴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으냐고 묻고 싶다. 

- 날씨와 얼굴, 우리는 쿠팡 노동자의 친구다 中


  스무 살이 되고 나서는 일용직 알바를 꽤 많이 나갔었다. 에어컨이 유일하게 달려있다는 단 한 곳, 바로 그 센터에서 근무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에어컨이란 흔히 집이나 카페에서 사용하는 성능 좋고 디자인 좋은 기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마주한 에어컨은 먼지바람을 일으키는 고물에 가까웠다. 애초에 물류센터라는 곳은 학교 운동장보다도 훨씬 넓고 천장도 높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에어컨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신 이동식 냉풍기를 자리마다 설치해 두었는데, 각자의 정수리 바로 위에서 바람이 나오는 식이었다. 시원하다기보다는 센터 내의 더운 공기를 계속 순환시켜주는 듯했다. 어찌 되었든 바람이 나오니 땀을 말려주는 용도로는 제격이더라도, 근본적 문제인 습한 공기는 해결되지 않았고 바람을 계속 맞고 있자니 숨이 찼다. 땀이 식으면서 몸에 힘이 풀리면 더 힘들다. 대기업에서 생각해낸 ‘노동자를 위한 에어컨’이란 예상보다도 훨씬 더 절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더울 때 시원한 곳에서 일하는 건 어떨까. 마찬가지로 스무 살 때쯤, 홈플러스 냉장창고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시원한 곳에서 점퍼를 입고 몸을 움직이다 보면 온몸에 습기가 차고 물이 고인다. 분명 땀이 나고 힘든데 코와 입으로는 찬 바람이 계속 들어와 더운 건지 추운 건지 모르겠는 상태가 된다. 쉬는 시간마다 체온유지를 위해 밖에 나갔는데 그 온도 차 때문에 일이 두 배는 힘들게 느껴졌다.

  이건 겨울에도 마찬가지인데, 춥다고 패딩을 입으면 움직임이 둔해지기 때문에 얇은 내복과 후드를 여러 겹 겹쳐 입는 사람이 많았다. 확실히 움직이면 춥지 않다. 춥지 않다는 말이지 정상체온이라는 말은 아니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데 이때도 한 몸에 더움과 추움이 공존하는 이상한 상태가 된다. 핫팩이 있지만 만져볼 새가 없어서 집 가는 버스에서나 몇 번 주물럭거렸었다. 

  아이스크림과 에어컨, 핫팩 무한 제공은 센터의 자랑거리였다. 한창 일하다 보면 관리자가 ‘자, 아이스크림 드시고 하세요.’ 하는데 그땐 이게 무슨 대단한 호의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단돈 몇백 원짜리 얼음조각을 건네는 게,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회유책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오만가지 생각이 드는데도 일단은 웃으며 받아들게 된다. 그건 우리가 천진난만해서도 아니고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서도 아니다.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추울 때 추운 곳에서 일하다 보면 그렇게 된다. 날씨를 몸으로 느끼면 그렇게 된다. 

  여름에는 공기청정기, 제습기, 냉방기, 선풍기가 잘 팔렸다. 그런 것들은 유난히 무겁고. 그런 날은 유난히 덥다. 그것을 끊임없이 포장하고 나른다. 날씨를 잊고 사는 자들을 위해 날씨를 온몸으로 느끼며.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 작은 제습기를 샀다. 며칠 전 비가 왔는데 빨래가 잘 마르지 않고 방 전체가 끈적거렸기 때문이다. 나도 잠시 날씨를 잊어버릴 뻔했다. 뉴스에서는 온통 기후 위기니 뭐니 하는데, 시뻘건 고딕체로 적힌 지구 멸망 네 글자보다 제습기가 담겨있던 쿠팡 박스 하나가 더 공포스럽다. 나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떠다니는 바다도, 쩍쩍 갈라진 땅도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더운 날 더운 곳에서 일하고 추운 날 추운 곳에서 일하며 마주했던 얼굴들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벌써 5월이다. 한 달만 지나면 또 더운 계절이 온다. 해가 지날수록 더 더워진다. 날씨를 잊고 사는 자들에게 그 계절은 낭만이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는 나 한 명의 꼿꼿함을 귀히 여기고, 이 마음이 절대 꺾이지 않게 스스로 잘 버텨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도저히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의 섭리인지 사회의 장난인지 모를 가혹한 인과관계에 마음이 답답하리만치 덥기도, 무서우리만치 춥기도 하다.



by.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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