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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Jun 08. 2023

262

5月, 이슬아의 『날씨와 얼굴』을 읽고

  ‘기후 세대’ 2000년 이후에 태어나 다가올 기후재난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는 여전히 세대와 세대를 구분해 책임과 피해 소재를 명확히 하려 애쓴다. 인간은 자신이 겪지 않을 재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니 기후재난의 피해자를 명시하는 일은 타 세대의 책임을 덜어주고 방관을 조장하는 태도이다. 지구에서 태어나 땅을 딛고 하늘을 진 모든 이들이 기후 세대이다.      

   인간은 또 다시 ‘고기’라는 단어로 가축과 동물을 구분 짓고야 말았다. 그런데 가축과 동물도 적합한 단어는 아니다. 가축은 집 가에, 짐승 축. 동물은 움직일 동에, 사물 물. 두 단어 모두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인간의 관점에서 정의된 단어는 그릇된 해석을 낳고 어느새 인간은 고기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인간은 살인의 죄책감을 덜어낸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동물, 동물고기를 구분함으로써 이를 방증한다. 시인 김선오는 시집 ‘나이트 사커’에서 고기에 대해 이와 같이 작성했다. 


“고기라니, 너무 이상한 말이다. 식재료가 되기 이전과 이후의 이름을 굳이 다르게 부르는 경우가 있던가. (중략) “돼지를 먹는다.”보다 “돼지고기를 먹는다.”가 더 고급문장으로 취급되는 이유는 그 말이 당장의 식사가 실제로 살아있던 동물의 사체를 먹는 야만적 행위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그들로부터 비롯되는 근원적인 양심의 가책을 지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물의 이름에 고기를 붙이며 잔혹한 도축의 현장을 애써 지우고자 노력한다. 그간 여러 사람들이 세상의 정의를 실천하고자 공장식 축산의 현실을 고발했다.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하지만 일시적인 감정이었다. 삼겹살 식당에 돼지고기가 걸어 들어왔을 때 적막이 흐른다. 그러나 1분 후 돼지가 나감에 따라 손님들은 다시 식사를 시작한다. 몸통이 채 들어가지 않는 작은 케이지에 목만 내놓고 계속해서 알을 낳는 닭들, 아니 알을 낳아야하는 닭들. 기업은 넓은 들판에서 스트레스 받지 않은 젖소들의 우유라고 홍보한다. 그런데 원래 젖소는 그렇게 키워져야 하지 않는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매우 기이한 일이다.      

  21세기 지구촌은 안타깝게도 여러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단순히 사람만이 아니다. 인간의 행위에 동물은 물론, 식물, 심지어 오존층까지 피해를 받는다. 나의 사소한 행동은 지구 건너편 아프리카의 식량난을 초래하고 저 멀리 북극곰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스스로를 위한다는 목적 너머 전 지구의 평안을 위해 행동을 실천해야 한다. 즉, 우리는 나를 위해, 그리고 너를 위해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아이슬란드 작가 ‘안드리 스나이어 마그나손’은 자신의 작품 ‘시간과 물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한다. 


“262년이야. 그게 네가 연결된 시간의 길이란다. 넌 이 시간에 걸쳐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는 거야. 너의 시간은 네가 알고 사랑하고 너를 빚는 누군가의 시간이야.” 


  오늘도 나는 태어나지도 않은 손녀의 딸이 살아갈 지구를 위해 분리수거를 한다. 



by.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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