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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Feb 18. 2024

사랑의 정의

사랑에 대하여 3 : 알렝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고

‘사랑을 멋대로 정의하기’가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인 만큼, 꽤나 시달려왔던 질문이 하나 있다.

나는 사랑을 정의할 수 있는가.

대학교 1학년 때 그런 무형의 감정들을 정의하고자 하는, 나름대로의 이름표를 붙여주고자 하는 마음에 오랫동안 토론을 했던 주제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사랑’이었다. (휴학을 한 번 했으니)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나는 어떻게 사랑을 정의할 것인가. 어떤 식으로 이 골치 아픈 ‘사랑’에 접근해야 할 것인가. 알렝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는 사랑을 정의하고자 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클로이라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과 낭만적인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게 되면서 느끼는 온갖 감정들, 가령 의심이나 불안, 가벼운 행복과 차오르는 기쁨 등을 확실하게 정의 내리려는 시도를 한다. 그 방법으로는 철학자의 말과 이론을 대입하는 것이고, 그는 이로 산출된 감정을 기반으로 다음 감정의 원인을 분석하고 연결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확실하지 않은 감정은 한 사람의 세계를 혼돈에 빠뜨린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인식하는 순간 ‘나’는 ‘너’의 타자됨을 인지하게 된다. 끝도 없이 ‘너’의 시선의 끝에 어떤 모습의 ‘내’가 있을지 의심하고, 불안해한다. ‘너’의 한 마디로 ‘나’는 우울해질 수 있고, ‘너’의 한 마디로 ‘나’는 환하게 가득 차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즉 나는 너를 ‘사랑’하는 순간부터 내 세계에 대한 주권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인 ‘나’가 클로이를 사랑하며 확실하게 정의를 내리고자 했던 모든 감정의 분석은 일그러지게 되고, 번호를 붙여서 단정하게 배치하는 등 확정성을 위해 몸부림쳤음에도 매끄럽게 다음 단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독자는 이 글에서 ‘나’가 파악하고자 하고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그 사랑의 과정’에 집중하면 참 눈이 고되다는 것을 느낀다. 그 과정은 논리가 여러 차례 뒤바뀌고 있고, 몇 개의 가느다란 실이 다 일그러진 논리를 엉성하게 묶고 있는 상황이다. 답답하고 안타까울 지경이다. 왜 박학 다식하게 설계한 논리들은 그의 ‘사랑’을 지탱해주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마지막 장인 <제24장 사랑의 교훈>에 나온다.


“나는 좀더 복잡한 교훈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의 모순들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교훈, 지혜에 대한 요구를 지혜가 무력해지는 상황과 조화시킬 수 있고, 첫눈에 반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그 불가피성과 조화시킬 수 있는 교훈. 사랑을 평가할 때에는 교조적 낙관주의나 비관주의로 달아나지 말아야 하고, 두려움의 철학이나 실망의 윤리학을 구축하지 말아야 했다. 사랑은 분석적 정신에게 겸손을 가르쳤다. 아무리 확고부동한 확실성에 이르려고 몸부림을 쳐도(그 결론에 번호를 붙여서 단정하게 배치해놓는다고 해도) 분석에는 절대로 결함이 없을 수 없다는 교훈, 따라서 아이러니로부터 절대로 멀리 벗어날 수가 없다는 교훈을 가르쳐주었다.”(285쪽)


결국 ‘사랑’이란 A=B의 간단한 도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주체는 주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사랑에 빠진 인간은 곧잘 타자가 되고, 타자가 된 인간은 도저히 자신의 세계를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으로 고통받고, 세계가 혼란에 빠지며, 계획했던 것이 무너지고, 또 그 과정에서 아주 쉽게 행복감을 느끼고 충만됨을 느낀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은 내가 나의 세계를 ‘사랑’이라는 굴레에 넘겨주었기에 느낄 수 있는 것들이고, 그래서 사랑의 중심에 들어와 있는 주인공은 자신의 감정을 분석하는 데 오류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감정은 ‘나’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닌, ‘사랑’의 영역 속 타자가 되어버린 ‘나’가 받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 또한 ‘사랑’을 정의할 수 없다. ‘사랑’ 속에서 나는 분석적으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랑’을 풀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사랑’을 정의할 수 없음이 곧 사랑을 정의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by. 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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