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형태소 Jan 05. 2024

자살을 반복하는 빌어먹을 세계를 위하여

사랑에 대하여 2 :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읽

사랑을 위해 살고 있노라 당차게도 내비쳤던 나의 낙관은 어느 사이에 가라앉아 내면 어딘가에서 겨우 붙어 있기만 한 숨을 헐떡이고 있다. 또 써야지, 씀으로써 그 결심을 유지해야 나는 스스로의 일관되지 못함에 느껴왔던 섬뜩함에서 이번에는 벗어나 보았다고 으스댈 수 있다. 그런 한심한 심정으로 키보드 자판 위에 프린팅 된 글자를 짓누른다. 사랑을 불러본다. 사랑을 생각한다. 그래, 너는 그 자리에 있었다. 오늘은 어떻게 돌고 돌아 사랑에게 가 닿아볼까.


글쎄,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내 생각에 표현이라는 건 삶에서 중요할 수밖에 없다. 감정이나 심상 따위의 것들은 늘 머리와 심장 근처를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들을 종잡을 수 없는 건… 그러니까, 당연히 그 아이들은 실체 있는 덩어리가 아니고 추상이고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지된 것들을 사고하고 표현한다. 눈 앞에 이파리 하나 없는 나무가 서 있으면 그것은 겨울이 될 수도 죽음이 될 수도 있다. 실체 있는 사물로서 감각기관으로 인지하기 쉽다면 사고와 표현도 비교적 쉬울 수 있다. 그런데 추상적 정념은 인지하는 것이나 사고하는 것이나 어려울 따름이고 표현은 더더욱 어렵다. 다만 내게 그 작업은 필요하고 즐겁다. 감히 말해보자면 자신의 안에 어떤 감정이 든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을 표현해내는 단계까지 꼭 나아가볼 것을 권한다. 감각할 수는 없는 것을 언어로 구체화 해냈을 때,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믿음은 분명해지고 그 감정은 비로소 내 것이 되며 스스로를 뚜렷하게 직시할 수 있게 된다.


이 작업을 잘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힘을 가져야 하겠다. 인지력과 사고력, 표현력! 이것들을 기르는 방법들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제시하자니 난 현자는 못 된다. 다만 “시”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그래 맞다, 이 장황한 서론은 내가 시집을 읽고 감동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쌩뚱맞은 전제인 것이다.


전제사항을 늘어놓는 김에 몇 가지를 더 이야기한다. 첫째로 우리의 생각의 범위는 경험의 범위와 궤를 함께한다. 비가 내리는 날에 기름에 지진 파전의 향기를 생각했다면 당신은 한국인일 확률이 높다. 그 경험이라는 것은 꼭 내가 직접 목도하거나 겪은 일이 아니어도 된다. 인류는, 아니 당신은 왜 전쟁을 두려워하는가? 수많은 책과 미디어가 그 참상을 짚어주고 경고하기 때문이다. 특히 누군가의 인정받은 창작물은 가장 정제된 경험이다. 따라서 내게 예술을 접하는 일은 범위를 넓히는 일과 같다. 둘째로 어떤 과정은 거꾸로도 일어날 수 있는 법이라서 우리는 잘 정돈된 미적인 표현을 보고 어떤 것을 인지하게 되기도 한다. 안도현 시인이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묻는 것을 읽고 나서야 어떤 이는 자신의 안에 있는 뜨거움을 인지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특히 시는 감정이 가장 민감하게 포착되고 언어와 밀착된 결과물이기 때문에, 시 속에서 낯설게 연결되고 조합된 표현들은 때로 우리 안에 다양한 감정들을 발현시켜줄 수 있다. 따라서 시는, 세상의 확장과 감정의 발견을 견인하는 예술의 일종이다.


진은영 시인을 읽었다. (잠깐, 당연스레 시와 시인이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로 얘기했다가 친구에게 혼난 적이 있긴 하다.)『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는 2022년 세상에 나왔다. 다만 내가 이 시집을 알게 된 것은 그때가 아니고 얼마 전인데, 또 다른 친구가 말하길 이 시집을 읽고 울었다는 것이다. 기사 몇 개를 읽어보니 ‘사랑의 시인’으로 유명한 진은영 시인은 철학을 공부했고 ‘삶의 태도’로서 사랑을 시로 썼다고 한다. 시인의 실천적 사랑은 어떻게 표현되고 그중 어떤 것들이 내게 느낌표를 선사했는가, 아니, 내 친구는 왜 울었는가? 몇 가지를 짚어본다.


비스와바, 삶은 변두리 사진관의 찾아가지 않는 사진들, 눈물로 지워진 계산서들,

아니면 몇 개의 불 꺼진 방으로 만들어진 그런 것인가요?


- 진은영, 『한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중 발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68~71p)


갓 스물이라는 나이를 맞았던 나는 고등학교 졸업식 전날, 마을공동체 아지트(잠깐, 마을공동체란 대체 무엇이고 아지트란 또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훗날 얘기하도록 하자.)에서 술을 마시다 뻗었고 그대로 졸업식에 지각까지 해버렸다. 술에 취했던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언젠가 우리 국어 선생님께서 소개해 주셨던 시를 낭독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경이로움』이라는 시였다. 그 시인의 이름이 시 속에서 등장하자 나는 추억이 살아나는 것이 느껴지기도 하고 마침 이 시가 시집의 중반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깐 읽는 것을 멈추고 이 시집이나 ‘시’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시집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자신 있게 시작했다만 시 속의 이미지를 짚어내면서 해설이나 비평을 해낸다는 것은 사실 나의 능력 부족으로 인해 이 글에서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시인은 무엇을 표현했을까, 그러니까 뭘 말하려고 했을까. 그것을 추측해보려는 노력을 담는 일일 것이다. 이 시집에서 읽히는 것은 낭만적 사랑, 그러니까 연인이 손을 잡고 함께 노을을 바라보는… 그런 사랑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사랑이 배제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진은영 시인은 뭐랄까, 사랑‘을’ 시로 쓴 게 아니고 사랑‘으로’ 시를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계속 읽어본다. 이 글자들은 내게 무엇을 던지고 있는가.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서 이어지는 시들을 살피다 보면 마음 속에 환희, 기쁨보다는 슬픔과 아픔이 자리를 채우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특이한 점을 밝히자면 보통 이런한 감정들은 시 속에서 나의 슬픔, 나의 아픔을 발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진은영의 시에서는 그 아픔이 나의 것이라기 보다는 시에 담긴 대상에 대한 것, 인간의 삶 총체에 대한 것이라고 느껴지고, 그것에 공감하고 함께 고통을 나누는 느낌으로 아파온다. 내가 지금 시인과 뜻을 함께하는 동행자가 된 것만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는 말이다.


아마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나는 무엇이고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은영 시인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려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삶의 태도’로서 사랑을 썼다는 시인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사랑‘으로’ 시를 쓴다는 것. 그러니까 이 시집에서 사랑은 주제가 아니라 태도인 것이다. 시는 비스와바에게 편지를 보내며 삶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아파한다. 그 아픔은 왜 시인에게 다가오는가, 그것은 시인이 사랑으로 삶을 대하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 진은영, 『그날 이후』중 발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44~48p)


유경근 씨에 대해 알아보았다. 유경근 씨는 사단법인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대한민국의 아픔이 된 그날에, 2학년 3반에 다니던 유경근 씨의 딸 유예은 양은 바다에 남겨졌다. 시인은 자식을 잃은 부모를, 그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그리고 예은이를 잃은 우리의 마음 또한 시로 보듬는다. 진은영 시인은 ‘아픔’을 두루뭉술하게 제시하지 않고 정말로 우리 곁에서 우리를 건드렸던 현실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위로를 건넨다. 태도로서의 사랑은 ‘위하는 마음’이다. 진은영의 표현들은 우리를 사랑하고 그것은 감정의 구체화를 넘어서는 목적이자 말 그대로 실천되는 위로이다.


진은영의 위로는 다양한 현실적 지점을 넘나든다. 『스타바트 마테르』(80~82p),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13~15p) 등에서는 부모의 과거와 유년기의 상처를 끌어안는다. 『모자』(22~25p)『시인 만세』(66~67p) 에서는 시인을 위로한다. 『아뉴스데이, 새뮤얼 바버』(83~86p)에서는 변화를 꿈꾸는 신념을 보듬는다. 『죽은 엄마가 아이에게』(96~98p) 에서는 버팀목을 잃는 고통 또한 살핀다. 세상에는 정말, 정말 많은 상처가 있고 시인은 그 모든 피딱지도 앉지 못하고 거듭 갈라지는 상처들의 틈새를 모두 꿰매려 시를, 그 기록들을 꾹 눌러 적는다. 처절하고 잔인한 아름다움이다.


이놈의 세계는 매일매일 자살하는 것 같다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

종이는 손수건—도무지 손바닥만 한 평화

종이는 신의 얼굴—세상을 통째로 구원할 재능 없는 신의 얼굴

…(중략)…

나이 먹었는데 절망해도 되나

죽을 때까지 절망해도 되나

차창 밖에다 물었다

검은 상자를 칸칸이 두드리며 물었다


- 진은영, 『빨간 네잎클로버 들판』중 발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106~107p)


시집의 말미에서 시인은 구제불능에 수렴하는 세계에 대한 절망을 토로한다. 위로하기 위해 세계의 고통들을 직시하고 절망을 반복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손을 내미는 일이란 스스로의 마음까지 갉아 먹히지 않을 수 없는 자기파괴적 위험까지 감수하는 일이다. 시인은 사랑이라는 태도 하나로 그것을 이겨내고자 한다. 그 사랑이란 얼마나 위대하고 뜨거운가. 나는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사랑으로 쓸 수 있을까. 이 빌어먹을 세계를, 나는 품을 수 있을까.


진은영 시인의 언어를 통해 세계를 끌어안는 태도로서의 사랑에 닿았다. 내게 그 사랑은 가능할 것일까, 이 사랑은 내 안에 있는 것인가 확신하기 어렵다. 다만 그나마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시인과 시의 역할에 대한 나의 주관과 경향, 나의 사랑의 범위가 확장되는 경험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모든 경험과 배움을 아끼고 즐기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 감정을 많이 가진 사람이 되면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기도, 내 감정을 타인에게 나누어 주기에도 용이해진다. 공감은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생존 전략이고 힘의 원천이고 이 세상이 택했으면 하는 가치이다.


책장을 덮으며 울음을 터트렸던 친구를 이해한다. 시인의 삶을 이해한다. 빌어먹을 세계를 위하여 충만한 마음을 유지하자. 죽어가는 잔해 속에서도 끈질긴 생존을 거듭하자.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서로의 살아갈 이유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염세와 허무의 위태로움 속에서 그래도 다시 한 번 사랑에 대한 낙관을 다짐한다. 역시 살아간다. 사랑을 위하여.




by. 감자

작가의 이전글 마음을 쓰는 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